2008년 6월 22일 일요일

예수신화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도의 반응
그리스도교는 다른 많은 미스테리아 종교와 더불어 유행한 또 하나의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교도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긴 했다. 이 새 종교에 대한 지성인들의 반응은 오늘날 주류사회의 종교적 지도자가 주변의 잡다한 종파를 바라보는 것과 유사했다. 그리스도교가 꽤 인기를 끌게 되어 단순히 무시해 버릴 수 없게 되자 그리스도교가 독창적이라는 주장은---정당하게---비판을 당했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제 주머니를 채우며, 제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주목한 최초의 이교도 작가인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110년대)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다만 과잉 열정을 지닌 미신적 광신도라고 보았다.
켈수스(170년대)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문명화된 다른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사람들' 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기 신앙이 유일무이하며, 고대 이교 신앙과는 반대가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켈수스가 보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불합리했다. 그들은 '자기 믿음의 이유를 논의하고자 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말함으로써 남들을 개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낮은 계층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그 종교는 계속해서 서민들에게 퍼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서민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퍼져 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믿음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 무지한 자들 사이에서 번성해가고 있다.

켈수스의 친구인 풍자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그리스도교가 어수룩한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돈을 갈취하기 위한 사기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어떤 상황에서든 돈을 버는 방법을 아는 전문 사기꾼이 어수룩한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면 그 사기꾼은 하룻밤 사이에 큰돈을 갈취하고 속은 자들을 비웃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 중반의 글에서 교인들 공동체를 비난했다. 그는 그 공동체가 돈을 버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들과,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는 소문을 큰 소리로 떠벌리는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썼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가 기성 종교가 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시인하며 서글퍼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심지어 부자들과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교육을 받은 여성들까지 그 신앙의 지지자들을 우호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사소한 권위를 얻기 위해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는 자들까지 꽤 있다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세기 중반에 루킬라라는 이름의 한 부자 여성은 실제로 거액을 기부해서 자기의 하인 마요리누스를 카르타고의 주교로 만들었다! 260년에 안디옥의 주교가 된 사모사타의 바울이 교회 예배를 아주 수지맞는 사업으로 만들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는 걸핏하면 부자 신도들에게 기부를 강요했고, 대부분을 착복해서 호사스럽게 살았다.
270년에 이교도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더없이 신랄한 비평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서들이 너무나 일관성이 없고,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불가능하고 거짓된 말로 가득해서 참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책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열다섯권에 달하는 책 속에서 조목조목 비평했다. 그는 육체적 부활의 믿음을 터무니없는 물질 만능의 사고라고 조롱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 세계가 어떤 계시에 따라 멸망할 거라고 말하면서도, 하잘것없는 개인의 육체만은 하나님 덕분에 영원히 보존될 거라고 주장한다는 이유에서 그 종교를 무식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은, 선량한 인간 사회의 기초를 뒤흔드는 거라고 그는 보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외길을 발견했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이교도 철학의 '보편적인 길'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 아폴론의 신탁을 포함시켰는데, 그 신탁은 그리스도를 찬양하지만, 부활한 하나님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을 때 포르피리오스의 저술이 즉각 금서가 되어 불길 속에 던져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막강한 로마 제국이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더구나 또 다른 미스테리아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이며 유일한 참종교로 수용했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유대 국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로마가 결국에는 유대인 역사를 신성시하는 종교---더구나 로마 총독이 살해했다는 유대인 선지자를 섬기는 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에서는, 이교 신앙의 어둠에서 인간을 빛으로 이끈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이 가장 선호한 종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성공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채택한 유일한 외래 미스테리아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17년 전인 304년에 한신인이 '제국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이 신인은 12월 25일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며, 신도들이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다. 이 신인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의 구원자 미트라스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적이자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미트라스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상 유대인의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는 AD 첫 세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절정에 이른 3세기에는 제국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흑해의 제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산맥까지, 사하라 사막의 접경 지대까지'---미트라스를 섬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미트라스 신앙의 기념물을 살펴보면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까지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가 되었으며, 흔히 그런 노예가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트라스 신앙에서는 실제로 '나중에 된 자가 먼저'(마태복음 20:16) 되었다. 2세기 말에 코모두스황제(재위 18-192)도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황제의 입문은 로마 세계에서 엄청난 자극제가 되어 교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코모두스 이후의 여러 황제들은 미트라스 신앙을 제국의 종교로 삼으려고 했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미스테리아가 달랐고, 선호하는 정도도 달랐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가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고 했다.
점점 분열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 황제들은 '하나의 신앙'을 필요로 했다. 보편적인 종교, 곧 '가톨릭catholic' 종교를 필요로 한 것이다('catholic은 '보편적' 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주). 황제들은 이러한 온갖 종교를 여러 시대에 걸쳐 제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4세기 전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이상적인 후보였다. 민중들에게는 미스테리아 종교가 항상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미스테리아 종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자 이거나 철학자들이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하며 권위를 훼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골치 아픈 지성인들을 배제시킨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게다가 이미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이 종교는 권위를 지닌 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당국자들이 바라던 종교가 아닐 수 없었다. 신비주의자가 없는 종교,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없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의 종교,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321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황제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동기는 분명 영적인 게 아니라 정지적인 것이었지만,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개종이 신성한 계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전투 전야에는 그와 '모든 군대'가 자정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의 징표'를 보았는데,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도교인의 십자가가 아니라, 이교도의 상징인 키로chi-rho였다.
하늘에 나타난 그 상징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잠자리에 든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자정에 본 상징을 들고 있던 그리스도는 '적과의 교전 때 이것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 상징을 그려 넣었고,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의 말을 믿기로 한다면 '평화의 왕자' 예수는 황제에게 마법 군대의 부적 하나를 건네 줌으로써 고대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제국을 손에 넣은 셈이다.


키로chi-rho 상징은 이교도의 파피루스 고문서에서 비롯한 것으로, 학자들은 예언적인 구절에 이것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키로가 그리스어로는 크레스톤Creston이며, '길조'를 뜻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키로는 그리스도를 가리기는 말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이교도에게는 길조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이중 의미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때에만 그리스도교를 강조했다. 그가 꿈에서 약속 받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을 때, 비문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로마 병사들이 이교도의 거룩한 수호자들로부터 신성한 도움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광장에 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육중한 석상 위에 자신의 두상을 얹어놓게 했고, 그의 모습을 헬리오스와 함께 동전에 새겨 넣게 했다. 그리고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이교도 세계의 최고 사제---라는 호칭을 여전히 사용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인 황제들도 382년까지 그런 호칭을 사용 했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는 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골족과의 전쟁(306-312)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짓을 했다.

그가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을 수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을 때 이교도들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후에도 여전히 사악하고 무자비했다. 325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한 직후, 그는 자신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친아들 크리스푸스를 살해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받는 것을 고의로 연기했다. 계속 죄를 짓다가 마지막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내세를 보장 받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악명은 로마 교회조차도 차마 그를 성자로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그래서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로 만족해야 했다 : 저자주).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조금 더 먼저 교인이 된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의 계모 살해에 연루된 후 추방이 되었는데, 내친김에 성지 순례에 나섰다. 거기서 그녀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무덤이자 탄생지인 동굴을 발견했다. 골고다에서 예수와 두 도둑을 못 박은 십자가 3개도 함께 발견했다. 이것은 정말 별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가 못 박혔다는 날로부터 300년이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유대인이 수천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처럼 뜻밖에 발견한 성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곳은 오늘날까지도 성스러운 곳으로 기려지고 있다.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들은 제국의 도처에 보내졌고, 가톨릭 교회는 헬레나를 '진짜 십자가의 발견자, 성 헬레나'로 기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묘지로 여겨진 성소 부지에 거대한 공회당을 세웠는데, 이 공회당은 장차 로마 가톨릭 신앙의 발전소인 로마 교황청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그저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로만 분열되어있는 게 아니라, 문자주의 공동체 자체도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작되자마자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교인들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황제의 무릎에 첩첩이 쌓아 올렸다고 한다!(황제는 그것을 모두 불태웠다 : 저자 주)
콘스탄티누스는 신학을 전혀 몰랐다. 사실 그는 이교에 가까운 연설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강제로 통합시켰다.
니케아에서는 하나의 신조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교회에서 그것을 되뇌고 있다. 신조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주교들은 황제가 직접 재판하여 범죄자로 몰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동의한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손님 자격으로 니케아에 초대 받아 황제즉위 20주년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주교들은 동의 서명을 한 후 후회를 했다. 훗날 어느 주교는 황제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우리는 그대가 두려워서 신성을 모독한 글에 서명함으로써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은 훨씬 더 무자비한 그리스도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다만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61-363)가 이교 신앙을 부흥시키려고 한 잠깐의 기간만이 예외였다.
율리아누스는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로 자처했는데, 미트라스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 그는 하나인 신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를 썼으며 겸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유대 그리스도교인 교회의 소망대로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이교 신앙이 잠깐 부흥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시 살아나서 훨씬 더 맹렬히 세력을 확대해 갔다.
니케아 신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영구히 분열된 채 신약 논쟁으로 위장된 정지적 내부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권위적 분위기 속에서 패배자들은 파문 당했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다. 오늘의 '정통'이 내일의 '이단' 일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말경에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는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썼다.

매년, 아니 매달 우리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하고 애매한 것을 묘사하는 새로운 신조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한 짓을 후회하고, 후회한자들을 옹호하며, 우리가 옹호했던 자들을 파문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남들의 교리를 저주하거나, 남들이 지닌 우리 자신의 교리를 저주하고, 서로 상대방의 교리를 갈가리 찢으며, 서로의 멸망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무렵 문자주의자 교인들조차도 로마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계획 완수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반그리스도'의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역사의 날조
로마 교회는 자체 신앙에 어울리는 역사를 필요로 했다. 적을 비방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승리를 자축하는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진실은 엄격히 억압되었고 좀더 수용 가능한 역사가 날조되었다. 이렇게 날조된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정식으로 당당하게 가공의 복음서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신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예수 이야기 자체인데, 저자는 그런 저술들이 비유적 허구 이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문자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허구를 만들어 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역사적 기록으로 통용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의 토대가 된 그런 저술들은 날조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2세기 말에 바울의 원래 편지들은 새롭게 개찬되어 바울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계보에 끼워 넣음으로써 바울을 영지주의에서 격리시켰다.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로마화하기 위해 바울을 유명한 로마 정치가 세네카와 가까운 인물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원고 300편에는 바울의 편지 8통과 세네카의 답장 11통이 담겨 있는데, 물론 모든 편지가 완전히 위조이지만 최근까지도 진짜 편지인 것으로 믿었다! 그 편지들 속에서 세네카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바울은 황제의 궁전에서 복음을 공식 설교하는 사람으로 세네카를 지명한다. 4세기에는 이런 날조를 기초로 해서 제롬은 자신의 그리스도교 성자 목록에 세네카를 포함시켰다.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 편지가 위조되기도 했다. 그 편지들이 지금은 신약에 포함되어 <성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빙성이 의문시되었다. 가톨릭의 대변자였던 유세비우스조차도 야고보서와 유다서, 베드로서, 요한서의 출처를 의심했고 계시록은 전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로마의 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이 썼다는 편지들은 5세기까지 계속해서 위조되고 희석되고 첨삭되었다.
라틴어로 번역할 때도 수많은 왜곡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의 가르침 등 여러 가르침도 이때 왜곡되어, 당시 정통으로 간주된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수정되었다.
그리스도교 성자들에 대해서는 상습적으로 허구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흔히 그런 허구는 죽은 이교도 현자들의 생애와 전설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권력의 핵심인 로마 교회를 신임하기 위해 베드로가 로마로 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 박혔다는 이야기를 꾸며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너무 늦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신약에 포함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기 있는 영지주의 저술은 영지주의 색채를 지운 채 편집해서 문자주의 문서로 만들었다. 심지어 이교도의 저술까지 각색해서 자신들의 도그마를 뒷받침하는 저술로 만들었다. 예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 이교도 시빌의 신탁은 4세기 초에 위조되어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예수의 신격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했다. 그들은 <오르페우스의 증언>도 위조해서 고대 미스테리아의 예언자가 자신의 원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의 저술을 서툴게 첨삭하기도 했고, 필론이 사도 요한과 율법 논쟁을 했다거나 로마에서 베드로를 만났다는 우스꽝스러운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그리스도교인으로 탈바꿈시켜서 신약에 나오는 아리마대의 요셉과 요세푸스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세푸스가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증언한 것처럼 내용을 덧붙여 놓기도 했다.
요세푸스가 썼다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후기 문서도 위조된 것인데, 그것은 요세푸스가 직접 문자주의 교리를 가르친 것처럼 꾸민 앞서의 위조를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밀한 언어학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학자들은 이 문서를 위조한 사람을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 냈다. 다름 아닌 이레나이우스의 제자이자, 이단자 사냥꾼 원조인 히폴리토스(220년대)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학자들은 또 바울이 썼다는 데살로니가후서의 언어와 문체가 히폴리토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 냈다---이 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진짜)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니 데살로니가후서를 위조한 것이 히폴리토스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성자 본디오 빌라도!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통용된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본디오 빌라도의 복권을 돌아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 신화를 역사적 문맥에 끼워 넣은 원래의 저자가 본디오 빌라도를 구원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로 설정한 것은, 잔혹했던 이 로마 총독을 유대인들이 너무나 증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케 한 후 손을 씻은 것은 그가 '은밀한 심중으로는'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에 따르면 빌라도는 이제 막 처형한 그리스도가 정말 신이었다는 보고를 로마에 보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진 것은 그것이 최초였다. 티베리우스 황제(모든 종교를 경멸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는 즉각 그리스도를 로마 신들의 반열에 올려 놓고 싶어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계획을 기각했다.
이 강력한 황제는 평소에 자신의 하인이나 다름없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몇 가지 이유로, 다만 혹독한 법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런 사건 자체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런 법이 발효되기 수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후 테르툴리아누스의 허구를 기초로 해서 <빌라도 행전>이라는 문서가 위조되었다. 그 후 이 문서를 기초로 한 <니고데모의 복음서>라는 후대의 문서가 만들어졌다---그래서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 문서를 '3중의 허구' 라고 일컬었다.
<니고데모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처형했다는 빌라도의 보고가 로마에 도착하자 황제는 빌라도를 사슬에 묶어서 잡아 오라고 명했다. 모든 의원들과 신들과 군대가 바라보는 가운데 황제는 이렇게 선포했다.

그지없이 불경한 자여, 너는 어찌하여 감히 그런 짓을 했느냐.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너는 이미 그 위대한 징표를 보지 않았느냐. 사악한 짓으로 인해 너는 온 세상을 파괴했도다. 그들이 그를 너에게 넘겨주었을 때, 너는 즉시 그를 보호해서 나에게 보냈어야 했다. 너의 보고에 언급했듯이 그처럼 의롭고, 그처럼 놀라운 징표를 보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았어야 했다. 그 징표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리스도라는 말을 입 밖에 내자, 그 순간 모든 신들의 석상이 무너져 먼지가 되었다. 빌라도는 '신들을 섬기지 않고 법도 지키지 않는 불경한유대인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자기 변호를 했다. 그러자 황제는 유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에게 진격하여 복종케 하라. 그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모든 민족의 노예가 되게 하라. 그들을 유대 지방에서 모두 쫓아내고, 그들을 하찮은 민족으로 만들어 세상 어디에서도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 그들은 악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빌라도는 형장으로 끌려가 주에게 기도를 드린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방인들의 모든 세대, 모든 가족들이 너를 축복 받은 자라 일컬으리라. 네가 총독으로 있을 때, 선지자들이 나에 대해 예언한 것들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재림의 목격자가 되리라.

곧이어 빌라도의 목이 베어지고, 주의 한 천사가 그를 데려간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아내 프로클라는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돌연 숨이 끊어져 남편과 함께 묻혔다. 빌라도는 결국 콥트 교회의 성자로 추앙되었고, 6월 25일은 그의 축제일이 되었다!(콥트 교회는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設을 주창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한 이집트 교회이다. 성육신한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성을 이룬다는 주장이 단성설이다. '정통' 교회는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 신인양성설을 교의로 채택했다 : 옮긴이 주)
한편 그의 아내 프로클라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자로 추앙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당시에는 역사로 믿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는 명백히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다소 수용 가능한 전통 역사---1천500년 동안 '절대적 진리gospel truth'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교 역사---를 만든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앞서의 실없는 얘기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전통 역사 또한 똑같이 부정확하며, 똑같이 공상적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친근한 얘기만 아니라면 역시 똑같이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얘기인 것이다.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그리스도교의 모든 허구 역사를 최종적으로 조직화하고 종합한 것은 4세기의 유세비우스 주교였다. 그는 '교회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니케아공의회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완전히 바꾼 주교들 가운데 1명이었다.
그는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전기 작가가 되어, 아첨하는 말로 황제의 살인 행각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린 전기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을 다스리듯이, 로마 황제는 문명화된 세상의 정부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시킨다고 신도들에게 설명했다. 황제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 대변자였다!
유세비우스의 임무는 로마의 그리스도교에 적합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현대의 고전학자의 말에 따르면 유세비우스의 글을 읽는 것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황당한 문학적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또 다른 현대의 고전학자는 더 퉁명스럽게 그를 '고대에 대해 최초로 철저하게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역사가' 라고 일컬었다. 또 다른 학자는 '고의로 시대를 날조' 했다는 점에서 그가 '부정직' 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학자는 유세비우스의 역사가 '피상적' 이고 '고의로 날조한' 역사이며, '자의적이며 마구잡이로' 만들어 낸 역사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역사가가 옳게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고전학자들이 유세비우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의 '영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을 그리스도교 역사에 포함시켰고, 교회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저술을 더없이 큰 의혹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상당히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비판적인 행위라고 선언해야 한다.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적에만 맞으면 언제든 습관적으로 그의 말을 인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말은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만 첫 3세기 동안 교회 '역사'로 살아남은 글이 그의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모든 교회 역사가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결국 거짓말이 항구화된 나머지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역사' 에서 유세비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비난을 전부 열거했다. 그는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의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들의 후계자 계보를 제시했다. 그 계보는 유세비우스 이전에, 아마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날조된 것이지만 유세비우스는 그 계보에 첨삭을 가했다.
그는 계보를 만들며 흔히 이름만 나열했는데, 어림짐작으로 선택했거나 날조한 이름을 역사에 끼워 넣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명백한 잘못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처음 1세기부터 로마 교회를 주교들이 이끌어 왔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단 1명이라도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유세비우스는 또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를 터무니없이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전기까지 집필했는데, 그 전기는 사실상 이교도 순교자의 전설을 베낀 것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저술 목록을 열심히 만들었는데, 현명하게도 그 저술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면, 그들이나 자신의 생각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젊었을 때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오리게네스에 대해 기술할 때에도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정통파 공동체에서 오리게네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유세비우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유린당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 구원자를 살해했으니 재앙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분명 재미삼아 아주 흉흉하게 묘사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사악하게 대우한 대가였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이 분노해서 AD 70년에---로마군의 도움을 약간 받아서!---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웃 펠라 지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라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는 또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을 때, 에비온파의 영지주의자 집단 하나만 발견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술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이단자가 될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유세비우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자신의 허구 이야기가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전혀 양심에 거리낌없이, 예수 자신이 에데사(지금의 터키 동남부)의 왕자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만들어 냈다---그 편지에서 예수는 왕자가 자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구세주를 믿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통용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전제적인 로마 황제에게 고용되어 아첨을 일삼으며, 200년 전통을 기만적으로 날조했다.


이교 신앙의 파괴
2세기에 자진해서 순교를 당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목격함으로써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는 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 역시 한때는 로마의 공개적 박해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잔혹' 한 것을 즐기며 지켜보았다고 시인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된 후에도 그와 같은 피투성이의 수난을 여전히 즐긴 것 같다. 그는 분명 재미삼아서 '최후의 심판' 때에 이교도들에게 닥칠 운명을 소름 끼치도록 폭력적으로 그려 놓았다.

구경거리를 원한다면, 모든 장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장관인 최후의 영원한 심판을 고대하라. 그 많은 지상의 군왕들, 거짓 신들이 암흑의 가장 낮은 심연에서 신음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얼마나 찬탄하고, 얼마나 웃고,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의기양양하겠는가. 주의 이름을 박해한 그 많은 관원들이 교인들을 불태웠던 것보다 더욱 격렬한 불길 속에서 녹아 내리는 것을 보리라. 현자라고 불린 그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기만적인 제자들과 더불어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리라. 그 많은 유명 시인들이 미노스의 법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리라. 그 많은 극작가들은 자기 자신의 수난의 노래를 흐드러지게 부르리라. 그 많은 무용수들은….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의 적대자들이 영원히 받게 될 소름 끼치는 형벌을 기뻐한다. 그는 불과 몇 세대 후에 그런 형벌이 실제로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가해지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최후의 심판때가 아니라, 4제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교 신앙을 말살할 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자, 문자주의자들은 이교도들에게 잔혹한 테러를 가했다. 이교도 예언자들은 체포되어, 그들의 신이 가짜라는 것을 시인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사제들은 그들의 성소에 사슬로 묶인 채 굶어 죽었다.
고발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이교도들은 어린애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고발을 당해서 신들의 제단에 그들의 피를 뿌렸고, 그들의 창자로는 현악기 줄을 만들었다---그들은 처참한 고문을 당한 후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고, 그렇게 처형당했다. 산채로 화형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일부 고대 성소는 능욕을 당한 후 철저히 파괴되었고, 더러는 징발되어 강제로 그리스도교 교회로 개조되었다. 이교도의 위대한 종교 저술들은 대규모로 소각되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질렀다. 금서를 소유한 자의 장서는 모조리 재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교 신앙이 공격을 당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을 잘못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들이 정말 병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견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다만 이교도의 신들은 어수룩한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기 위해 마법을 부리는 악마로 간주되었다.
이교도의 '다이몬'은 사악한 '데몬(악마)' 이 되었다. 따라서 이교신앙은 말살되어야 했다. 4세기 중반에 한 주교는 그리스도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재위 337-350)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우상숭배의 범죄를 모든 면에서 혹독하게 박해해야 하는 것은 지고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황제에게 명해진 것입니다. 통촉하소서, 그런 범죄에 관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듣고 믿으소서. 그 아들도 형제도 용서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명하십니다. 칼을 들어 그 아내의 수족을 베라고 명하십니다. 그 친구 또한 아주 심하게 박해하고, 신성을 더럽히는 민족의 몸을 갈가리 찢기 위해 모두 무기를 들라고 명하십니다.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도시까지도 죄다 파괴하라고 명하십니다.

383년에 로마의 이교도 원로원 의원인 시마쿠스는 너무나 참담한 나머지 그리스도교인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지만, 헛일이었다.

모든 숭배는 같은 것으로 여겨져야 합당합니다. 우리는 같은 별, 같은 하늘을 봅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우주에 속합니다. 각자 진리를 찾는 방법이 다르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위대한 비밀에 이르기 위해 유일한 하나의 길로만 갈 수는 없습니다.

386년 무렵에는,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광신도 수도사 무리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피에 굶주려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법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교도인 리바니우스는 황제가 개입해 달라고 이렇게 호소했다.

폐하는 신전을 폐쇄하라거나 아무도 신전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폐하는 신전과 제단의 불과 분향을 배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검은 복장을 한 이 폭도들은 엄연히 법이 있는데도 법을 무시하고, 곤봉과 돌과 쇠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신전을 유린하며, 더러는 맨손 맨발로 유린합니다. 그래서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지고, 석상이 끌어내려지고, 제단이 뒤집어지고, 사제들은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음을 당합니다. 첫 신전이 파괴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신전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법을 어기면서, 전승 기념비를 철거해서 첩첩이 쌓아 올립니다. 대부분 교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더러는 도시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수가 너무나 많은데, 작은 무리로 흩어져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후 함께 모여서, 무슨 짓을 했는지 서로 다투어 자랑하다가, 최고의 만행을 저지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한 익명의 이교도(390년대)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죽을 무렵에는 남아 있는 성소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세라피스 신전도 형체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거짓말처럼 텅 빈 어둠만이 괴괴할 것이다.

391년 6월 16일,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모는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스도교인 폭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달려가 초석만 남겨 놓은 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황제는 또 이렇게 명했다.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모든 책을 불살라라. 그 책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그리고 경건한 자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러자 문맹자 수도사들은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지혜와 과학적 지식을 이교도의 미신으로 취급해서 닥치는 대로 말살해 버렸다.
'그 수도사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돼지처럼 산다'고 말한 이교도 작가 에우나피우스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렇게 썼다. '검은 복장을 한 자들은 모두가 횡포한 자들이다'.
41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로스는 수도사들을 시켜 한교인 폭도를 선동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이교도 과학자를 살해하게 했다. 그 과학자는 히파티아라고 불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사지가 갈가리 찢겼고, 키릴로스는 성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이교도 종교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세기 후, 테오도시우스 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믿어야 할 유일한 종교로 선포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395년에 사망했다. 정확히 15년 후 로마는 서고트족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혔다.
고대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의 심장부인, 자랑스러운 이 도시는 여러 신들을 섬기며 천년 동안 번영해 왔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지 몇 십 년 만에 수많은 경이적 유물과 성취가 파괴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476년에 서로마 제국 멸망 : 옮긴이 주). 그리스도교는 미트라스 신앙이나 다른 이교 신앙이 실패한 로마 제국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동반한 종교였다.


영지주의의 말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에도, 영지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4세기에도 여전히 이단적 교인들이 많아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경고 해야 했다---실수로 영지주의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테오도시우스 치하에, 이집트의 성직자와 수도사 사이에는 이단자가 너무나 많아서 티모테우스 주교는 일요일마다 강제로 고기를 먹게 함으로써 채식주의자인 영지주의자들을 솎아 냈다!
철학자 시네시우스는 명백히 영지주의자였는데도 키레네의 주교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이교도 과학자인 히파티아와 함께 플라톤 철학을 연구했고, 부활을 신성한 미스테리아의 비유로 여겼다.
그는, 유일하게 참된 종교는 철학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교적 이야기와 의식은 철학자가 아닌 자들을 위해 철학적 진리를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통을 부르짖는 당대 상황에서 그는 주교로서 '은밀히 철학화' 하지 않고 공개적 노선을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위해 부활절 의식 대신 입문식을 치르게 했다. 그것은 정통 그리스도교보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와 관계된 것이었다.
영지주의가 계속 인기를 유지해 가자 로마 교회는 강제로---무자비하게 효율적으로---그리스도교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영지주의를 금하는 100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모임, 입문, 재산 소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를 불법화했다! 포고령 하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이 법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알린다. 노바티아누스파․발렌티누스파․마르키온파․파울리키우파, 너희의 교리는 거짓과 허영으로, 파괴적이며 악의적인 범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너희에게 경고한다. 너희는 어느 누구도 이 시간 이후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한다. 이 법령을 어길 경우, 너희가 모임을 가진 모든 가옥을 몰수해서 그것을 즉각 가톨릭 교회에 넘겨주게 될 것이다.

마침내 381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을 국가 반역죄로 규정했다. 영지주의 저술은 '금지되기만 해서는 안 되며, 전부 파괴하고 불태워야 할' '온갖 사악함의 온상' 으로 매도되었다. 모든 철학적 토론은 전적으로 억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포고되기도 했다.

너희는 공개 석상에 나가서는 안되며, 종교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해서도 안되며, 토론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어도 안된다.

5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막강한 대주교인 키릴로스를 위해 '악역'을 수행한 어떤 수도원장은 이단적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위협했다.

너희가 키릴로스 대주교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희들 대부분의 목이 베일 것이며,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자들은 추방될 것이다.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대변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겁을 주어야만 사람들이 말을 듣기 때문에 강압 조치가 필요했다는 말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 준다. 군사력은 이단자를 억압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스스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너희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하겠다'. 바울의 사랑과 그노시스의 영적 종교는 로마 교회의 복종과 테러의 종교가 되었다.


본래부터 편협한 종교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무수한 종파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 가운데 거의 전부---가톨릭, 정교, 개신교, 비국교도 등---는 근본적으로 4세기에 문자주의의 승리로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은 예수의 역사적 존재성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들은 전제적인 콘스탄티누스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사도신경에 동의한다. 그들은 초기 교회의 끊임없는 교리 투쟁과 극악한 위조와 부패한 권력 투쟁 등의 우여곡절을 통해 신약에 포함시키기로 선택된 소수의 문서만 읽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한 사조였을 뿐인 문자주의가 곧 그리스도교라는 잘못된 생각을 물려받아 왔다.
문자주의는 어떻게 영지주의를 이길 수 있었을까? 자체 특성상 영지주의는 신비한 특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반면에 문자주의는 제도적 종교를 신봉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적 계몽에 관심이 있었고, 교회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문자주의자들에게 승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자주의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였고, 입문자를 영적인 길로 이끌기 위한 준비 단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환상적인 마법과 기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례를 받고 믿기만 하면 불멸성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는 은밀한 미스테리아보다 더 대중적으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예수의 말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된 자는 적다'(마태복음 22:14).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면, 공개적 미스테리아가 인기가 있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노시스의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영지주의와 문자주의가 분열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자, 문자주의가 더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문자주의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승리할 때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추구된 하나의 커다란 특성, 곧 편협성 덕분이었다. 그런 편협성은 역사의 변덕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연히 야기된 부산물이다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는 본래부터 관용적이었다. 그것은 신화를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종파는 다른 신화를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대립적이지는 않았다.
다양성이 수용 가능했던 것은, 내적 의미를 중시할 뿐 외적 표현은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주의는 본래부터 편협했다. 예수가, 하나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자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는 그런 역사성을 따지지 않는 다른 모든 종교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전파할 도덕적 의무를 갖게 된다.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면 강제로라도 전파해야 한다---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에 대한 로마 교회의 공격은 종교적 성전(聖戰)이었고, 하나님이 부여한 의무였다. 자기만이 옳다는 편협성은 그처럼 성스러운 것이 되었다.


결론
앞서의 증거를 되돌아볼 때,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가 역사상 가장 큰 은폐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교의 원천인 영지주의 가르침,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참된 뿌리인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가혹하게 억압을 받아 증거가 대규모로 말살되었고, 로마 교회의 정치적 목적에 어울리는 거짓 역사가 날조되었다. 공식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처형을 당해서, 이윽고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좀더 최근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극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과거 정권에 몸담았던 공무원을 포함한 엄청난 인구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왜? 살아남고 싶으면 공산당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과거 정권에 연루된 사람은 인민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와 유사하게, 일단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자,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왜? 그리스도교인은 특혜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평화롭고 성공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인이 되지 않으면 '의견을 달리하는' 이교도, 곧 하나님의 '적' 으로 낙인이 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스탈린 선전자들이 그들의 전제정치를 미화시키고, 그들의 도그마가 참되고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사악하게 역사를 날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선전자들은 교인들에게 거짓말을 주입시켰다.
공산주의처럼 그리스도교도 처음에는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결국에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을 만들어 냈다. 근년에 공산주의의 독단적 편협성은 중국과 캄보디아의 광신적 청년 공산주의자들을 부추겨 문화혁명이라는 재앙을 불러왔다. 이때 그들은 풍요한 고대의 유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고, 수많은 지성인들을 학살했으며, 그들의 사회는 위기에 처했다.
마찬가지로 약 1천500년 전에, 광신적 그리스도교 수도사들도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때 고대의 경이로운 유적과 이교 신앙의 문화적 업적이 잿더미가 됨으로써, 서구문명은 1천 년이나 퇴보하고 말았다.
이교도 유산을 그처럼 막무가내로 파괴한 것은 서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잃어버린 유산의 규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교도의 신비주의와 과학적 탐구 정신은 독단적 권위주의로 바뀌었다. 로마 교회는 영적 구원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인하며 위협과 폭력으로 그들의 신조를 강요했다. 고대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잿더미가 되는 동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문자주의자의 근본주의 신앙이 승리 했음을 이렇게 선포했다.

<성서>의 권위에 입각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모든 정신력보다 <성서>의 권위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피라미드와 파르테논 신전을 세웠지만, 유럽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몇 백 년이 지나는 동안 벽돌집을 짓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BC 1세기에 포시도니우스는 행성들의 궤도를 충실하게 반영한 태양계의 아름다운 공전 모형을 만들었다. AD 4세기 말경에는, 하나님이 매일 밤마다 하늘에 별을 설치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BC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불과 몇 퍼센트의 오차 이내에서 지구의둘레를 정확히 추산해 냈다. 그러나 AD 4세기 말경에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단자로 몰렸다.
우리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교 신앙이 그토록 원시적인 반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면, 왜 이교 신앙은 그토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왜 참종교는 그토록 몽매한 1천년의 암흑시대를 불러왔는가?



1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사방의 지류를 받아들이는 진리의 강이 하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분명 고대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그리스도교를 재평가해야 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교도 점성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만들어진 것은 물고기자리의 큰 달이 시작된 때였다. 이제는 물고기자리의 시대가 끝나 가고,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가 밝아 오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역사 흐름의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러 면에서 과거의 시대 변화를 상기시켜다. 묵시적인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더 팽배해 있는 것이다. 낮설고 새로운, 절충적 종교가 도처에서 일어서고 있다. 기존의 종교는 불신되며 쇠퇴해 가고 있다. 다가올 물병자리의 시대에는 영적 종교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당당하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 온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관점에서 이 기나긴 세월은 분명 권위주의적 종교, 종교적 편협성,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암흑시대' 였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참신앙으로 자처함으로써, 다른 모든 영적 전통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그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 논리에 따라 폭력으로 온 세상의 다른 사회를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자체의 신비주의자와 자유사상가들을 끔찍하게 박해했다.
유대인의 아버지 신 여호와를 유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얼굴로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여성 신격을 억눌렀고, 그러한 신학적 관점은 여성을 남성에게 합법적으로 종속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지적 질문을 억압하고 도그마를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고집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종교에 등을 돌리고 모든 형태의 영성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이 종교를 기껏해야 여흥으로, 나쁘게는 편견과 편협과 갈등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혜와 문명의 원천으로서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반면, 서구 문화귄에서는 조상들을 악마의 숭배자라고 매도해왔다. 그것은 서구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서구인들은 문화의 뿌리를 단절시켜 왔다. 15세기에 르네상스, 곧 '재생' 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기간에 이교도 철학을 재발견한 후 비로소 서구 문명은 침잠해 들어갔던 미신과 투쟁의 늪에서 기어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근대에 서구는 과학적 지식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인들과 달리, 서구인들은 앎과 영성을 같은 미스테리아의 두 국면으로 보지 못했다. 서로 화해할 길이 없는 적대적 관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하나의 종교라는 깃발 아래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문자주의 그리스도교 자체가 심한 분열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 남자와 여자, 과학과 종교, 믿음과 이성이 대립해 왔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새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참담한 분열이 서구 영혼 속에 남겨 놓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고대 미스테리아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영적 진화라는 보편적 흐름을 다시 탈수 있고, 악마의 것으로 낙인 찍었던 다른 모든 종교적 전통을 적이 아닌 파트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무거운 짐인 구약과 오직 한 부족의 질투하는 신을 포기한다면, 여성 신격의 지혜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독단주의를 포기한다면, 발견의 모험을 통해 과학적 앎과 신비주의를 통합한 고대의 경이를 다시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이 실제 사건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 자체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회복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대하기에 너무 벅찬 것일까?
고작 100여 년 전만 해도, 가장 사색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자연의 진화라는 다윈의 생각은 우스꽝스럽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다윈의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은 압도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예수 미스테리아'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교 신앙에서 진화했으며, 예수 이야기도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비유적 신화라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 주장은 너무나 명백해서 논쟁 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유일무이한 역사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역사에 느닷없는 단절은 없다. 변화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 미스테리아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모습이 바뀌었다. 서구의 영성은 이들 두 위대한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제 우리의 모든 풍요한 유산의 공통 기반과 그 유산에 대한 권리를 회복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근본주의자들의 반발 압력에 굴복해서 권위주의적인 과거로 회귀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격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인들은 '<성서>에 씌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라는 상투적인 말에 굴종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이미 그리스도교는 과거와 같은 지배력을 잃었다. 그러한 지배력의 상실과 더불어 우리 문화는 필사적으로 새로운 영적 방향을 찾아왔다.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뿌리로 돌아감으로써만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의 새로운 명성을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거짓말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조만간에 그 토대는 반드시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초시간적 진실의 반석 위에서 안식하고 있으며, 과거에 늘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초시간적인 진실과 잇닿아 있다.


하나의 진실
모든 영적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은 항상 현재적이며, 결코 변치 않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느닷없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만 인간의 항구적인 의미 추구의 한 장(章)이며, 진화하는 인간 의식의 대양에서 일렁인 하나의 물결이며, 아득한 고대로부터 신비주의자들이 도달했던 초시간적 그노시스를 언어화하고자 한 하나의 시도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 유일하게 소풍삼아 지상에 도래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약속된 재림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신God이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인이 예수 이야기 속에 암호화한,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할 수 있는 전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볼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심오하고 신비한 가르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가르침은 수세기에 걸쳐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철저히 탐구하는 것은 너무 큰 과제여서 이번 책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다음 책을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 이번 책에서 우리 두 사람이 입증하고자 한 것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그리스도교 양자의 핵심에 본질적으로 하나의 항구적인 철학이 내재해 있다는 것, 그리고 전통적으로 적대해 온 이 두 종교는 사실상 근친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교가 잃어버린 어떤 것---그노시스의 비밀을 밝혀 주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그리스도교를 해친다고는 보지 않는다. 역으로 고대 예수 이야기의 장엄함을 밝혀 주는 명제라고 본다.
고대의 예수 이야기는 진실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이다. 만드는 데 수천 년의 세월이 걸린 이야기인 것이다.
<역사의 연구>에서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썼다.

죽어 가는 반신반인의 모습 뒤에는, 여러 이름으로 여러 세계를 위해 죽는 참된 신God의 위대한 모습이 어려 있다. 미노스 문명 세계를 위한 디오니소스, 수메르 문명 세계를 위한 타무스(담무스), 히타이트 문명 세계를 위한 아티스, 시리아 문명 세계를 위한 아도니스, 그리스도교 문명 세계를 위한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단 한 번 수난을 당한게 아니라 여러 차례 출현해서 수난을 당한 이 신God은 누구인가?

그 답은 바로 우리 각자이다. 고대 미스테리아는 우리 모두가 신의 아들과 딸이라고 가르쳤다. 희생된 신인 신화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도 부활해서 참된 불멸성, 거룩한 정체성을 얻을 수 있다. 이교도 철학자 살루스티우스는 미스테리아 신인 아티스의 신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티스 이야기는 과거 속에 고립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보편적 과정을 상징한다. 그 이야기가 질서화된 우주와 밀접하게 연계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의식(儀式)에 따라 재생산해 우리 내면의 질서를 얻게 된다. 아티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신비하게 아티스와 더불어 죽어서 아이로 재탄생한다.

예수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신화도 '과거 속에 고립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항구적으로 영적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예수 신화는 바울이 주장한 신성한 비밀, 곧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지금도 드러낼 수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도마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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