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를 이은 어의!"
양반 신분도 아니다. 오르고 올라 정승이 될 것도 아니고 보면 의원 중의 의원이란 칭송을 받으며 세 임금을 모신 삼대를 이은 어의의 명예로서 그는 만족한 것이다.
예문관 앞 돌다리를 건너며 양예수는 걸음을 세줬다.
어의라는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서였다.
"차비 대령할 아이들은 어찌 아직 보이지 않느냐?"
따라나선 김응택이 수목에 싸여 매미소리가 어우러진 내의원 쪽을 초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내의원 돌담을 돌아 차비를 마친 선임의녀 다섯 사람을 거느린 내의원 직숙과 기별 가지고 왔던 내시가 급행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공빈마마 처소로 달리게."
양예수가 김응택에게 명령하고 정작과 함께 대조전 쪽으로 길을 잡았다.
병자가 공빈이고 보면 사태를 임금께 먼저 아뢰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대조전은 임금의 침전이다.
6간 대청을 가운데로 왕의 침실을 동온돌 왕비의 침실을 서온돌이라 부르며 왕부부의 합방을 주선하는 날 외에 낮시간엔 임금이 들르지도 않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단초절을 맞아 조정 대신들의 하례를 받은 임금이 대조전에 납셔 계시다는 기별은 아까 이미 들었었다.
이성이 그리울 때면 으레 공빈 처소로 들르는 임금이 이날따라 낮시각에 대조전에 들른 것은 생산하지 못한 아내라 하여 의무적인 날 외엔 돌아보지 않는 지아비에 대한 무언의 시샘인지 스물세 살 왕비는 대조전 숲이 아름답다는 핑계로 임금의 거동이 기별되지 않는 날에도 서온돌에 자주 들렀고 특히 오늘 단오절을 맞아 궁안의 어린 항아(이제 5, 6세의 장차의 궁녀 예비생들)들을 모아 추천(그네)놀이를 벌인다 듣고 잠시 말벗삼아 들러준 모양이었다.
대조전에 항아들의 그네놀이가 한창이었다.
그걸 구경하며 사실 이상으로 흥겨워하는 왕비 곁에 왕비보다 두 살 위인 25세의 청년 선조가 서 있었다.
양예수와 정작이 정감(대조전의 호위직) 앞에 읍해 기다리자 두 사람을 발견한 수행승지가 다가왔다.
양예수가 찾아든 연유를 전하자 이미 들은 바 있는지 승지가 침착하게 정정했다.
"공빈마마의 환후가 아니고 본곁(친정) 식구 중에 마마의 동생이라 하오."
"공빈마마가 아니라구요?"
양예수의 가슴에 실망의 그림자가 지났고 임금 선조가 다가왔다. 임금의 움직임과 함께 그네가 멎으며 왁자 떠들썩하던 대조전 뜰이 조용해졌다.
승지가 선조께 아룄다.
"아까 주달했던 그 일이옵니다."
"소인은 공빈마마의 문후인 줄로 알고 달려왔사옵니다."
선조가 말수 적게 입을 열었다.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혔다.
대조전을 나선 양예수의 가슴에 잠시 전의 실망이 환희가 되어 되살아났다. 직책이 어의라 하나 환후 곕시기 전엔 임금과 말 한마디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자기를 향해 내린 옥음을 들은 것이다.
...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각별히, 분명 각별히라고 말했다. 왕의 그 특별한 관심에 대해서 감격했다. 구안와사는 까다롭긴 하되 어려운 병은 아니다.
적어도 어의의 소임에선 쉽고 간단한 병에 속한다.
그런데 별로 어렵지 않은 작은 병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임금의 특별한 관심을 담아서 ...
자기 운이 창창하다는 데 대해서 실감했다.
임금뿐 아니고 공빈의 지극한 관심 속에 자기 이름이 또 한번 오르내릴 것이라는데 절로 걸음이 날듯한 기분이었다.
병자는 공빈의 남동생 19세의 김병조였다.
공빈 처소인 진숙궁 뜰엔 공빈을 위시 그의 생부이자 임금의 장인인 사포서 별제를 지내는 김희철이 보였다.
그 김희철은 양예수도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본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인 김희철이었으나 그 늠름한 모습에 반한 선조가 사냥길에 동행시킨 것이 오늘의 공빈이 있게 된 인연이었다. 그날 사냥길의 귀로에 김희철의 집에 들렀다가 그 딸의 미모에 이끌린 선조는 그 딸을 청하여 후궁을 삼았다.
그러나 결벽한 김희철은 그날 이후 임금 사위와 왕자인 외손주가 있는 대궐 쪽은 애써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엄명을 내려 궁출입을 막았다.
뒷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비장으로 출전, 금산 싸움에 전사, 영천의 방산서원에 제향받는 그는 "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할 만큼 아직 평화로운 이 시절에도 그런 고집을 가진 충의지사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아버지의 결벽을 원망한 건 공빈 쪽이었다.
특히 여러 남매 중 병조에 대한 우애가 깊어 공빈은 무시로 동생을 진숙궁에 불러들였고 그렇게 불려온 막내처남을 선조도 사랑했다.
그러나 문무 어느 쪽이 되었건 떳떳이 과거를 치러 등방하기 이전엔 결코 궐내 출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김희철의 고집이었다.
그런 장인의 고집을 들으며 무관인 김희철을 대궐 내 정원을 관리하는 사포서 별제로 만든 건 조정 안에서도 흔치 않은 미담으로 알았으나 병조는 누님과 자형의 위세를 자주 드러내는 좀은 망나니였다.
그 병조가 동생의 병을 나라 안 최고의 의원에게 고치고자 앞장선 공빈을 따라 진숙궁 뒷방에 유유히 들어서는 양예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적의에 찬 눈을 뜨자 누이 공빈이 달랬다.
"이분은 상감마마의 옥체를 돌보시는 어의시다. 나라 안 첫째가는 의원이니 그 수건 떼고 다가앉거라."
"싫소? 이놈 저놈 만나는 자마다 침을 찌르고 약을 퍼먹이니 낫울 수없는 의원이거든 그 침통 끄르기 전에 돌아가오!"
"제가 어의오이다. 비록 어려운 병이라 하나 고치지 못한 병이 없는 사람이니 증세를 보이소서. "
하며 병자에게로 다가앉았다.
같은 시각. 혜민서의 허준도 입도 눈도 돌아간 흉측한 남편의 얼굴에 눈물을 떨구는 아내와 노모를 따라온 농부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구안와사 환자였다.
6
"나을 수 있사온지 ... 수의께선 우선 그 대답부터 들려주소서."
초조해하는 공빈의 안색을 대신 읽고 있던 지밀상궁이 재촉했다.
그녀는 공빈도 공빈이려니와 상감의 관심이 지극하게 쏠린 병자임을 알기에 상감을 모시고 섰던 큰방상궁의 눈짓을 받아 양예수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대답은 서두를 것 없다. 대답은 천천히 ... '
양예수가 지밀상궁의 재촉을 묵살한 채 노회한 타산으로 .마음속에 뇌었다.
닷새면 족하리라. 그렇게 암산된 병세일지라도 일단 뱉어버린 날짜는 병자와 그 가족에게 절대적인 기간으로 기억되고 만다.
그 닷새를 넘길 경우의 실망과 비난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 의원이다.
'한 ... 열흘이면 되오리다.'
그러나 양예수는 열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업은 아닐지라도 대신들 속에는 의서를 왜 깊이 읽은 인물들이 많은 걸 그는 알고 있다. 의서의 기본조항인 정기편이나 양생편이 특히 그 선비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관심사이므로 ... 만일 열흘이라고 말했을 경우,
"그만 증세에 열흘씩이나 성총(임금의 생각)을 어지럽혀 드린단 말인가."
"병자가 병자인만큼 신중히 대처하려니 그 날짜는 잡아야지."
궐내의 이목이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뉠 것도 양예수는 안다.
"한 ... 이레면 차도를 보오리다."
초조해하는 이들에게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양예수가 날짜를 제시했다.
병자의 지체가 높은 이일수록 더구나 왕실의 고귀한 분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수록 어의를 비롯 내의원 의원들은 이때야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최대한으로 내세울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닷새로 암산한 완쾌를 이틀을 더 여유 있게 이레로 잡으며 양예수는 자신이 만만했다.
지밀상궁이 그 양예수의 언약을 입에 물고 임금에게 달려갔고 곁에 숨을 삼키고 있던 공빈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양예수에게 다짐의 말을 물었다.
"그 이레면 정녕 이 아이의 얼굴이 온전히 돌아오리까?"
"이레면 되오리다."
양예수가 자신있게 다시 다짐의 말을 하자 공빈이 아름다운 눈 속에 감사의 눈물을 담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레씩이나 ...?'
정작은 불만이었다. 정작이 시진한 증상으로는 닷새면 되었다. 눈이 돌아가고 입이 비틀어져 보는 이를 긴장시키긴 해도 그건 중병이라 일컬을 환증이 아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양예수가 상감과 공빈이 마음 졸이는 판국에 이레씩이나 날짜를 잡는 것이 그의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였다.
이레라 선언해놓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게 해놓고 엿새나 닷새 만에 낫우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의술을 돋보이게 하려는 양예수의 저의가 환히 들여다 보여서였다.
'간물들!'
정작은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왕실에서 위엄과 인자함을 꾸민 어의가 자신의 소매 속에서 화사한 손수건을 꺼내 병자의 흐르는 침을 손등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아첨 어린 모습을 쏘아보았다.
청담순기탕, 그 구안와사를 다스리는 약재를 시종들에게 준비시키는 것을 보며 정작은 그 자리를 떠났다.
정작은 양예수가 지시한 청담순기탕을 조제하기 위해 약재의 양을 상정하는 회의에 끼여야 할 자신을 잊고 진숙궁 화려한 화원가에 우두커니 서서 간살떨며 교묘히 살아가는 인간사의 너저분한 욕망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전별감(임금의 호위대장)이 갑자기 닥쳤고 그 뒤로 청년 왕 선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황히 물러나 허리를 굽히는 정작에게 임금이 낯을 기억한 듯 걸음을 멈추고 옥음을 울렸다.
"사태가 어떠하오?"
"구안와사올시다."
"중증인가?"
"어의가 이레면 완치하리라 다짐하옵니다."
"그 말을 막 들었소만 애초 증상은 어디서 오는 병인가. 눈동자도 입도 돌아갔다 들리거늘."
"풍이 혈맥 속에 스미면 발생하는 병올시다."
"풍?"
임금이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이때 혜민서에도 같은 문답이 오가고 있었다.
허준이 지레 죽을 상을 한 농부애게 구안와사의 원인을 천천히 설명했다.
"풍도 풍이려니와 원인은 위에서 기인합니다."
"밥먹은 걸 삭이는 위?"
"그러하오이다. 밥주머니, 허허허."
"의원께서 웃으시는 걸 보니 이 양반 병이 낫기는 낫는 병인지요?"
병자의 아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허준에게 묻자 허준이 아직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장담이라 할 것은 없되 제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사흘이면 본모습이 되오리다."
"정말 사흘이오니까? 믿어도 되올지 ...?"
허준이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사람의 건강은 오장육부가 실하여 그래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놀리는 것인데 때로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쐬거나 혹은 준비행위 없이 힘을 써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맞을 때 무리한 부분에 마비가 오는 것올시다. 물론 댁처럼 바위 위에서 잠을 자다가 돌이 지닌 그 냉한 기운이 몸에 스며 이리 된 경우도 마찬가지 이치고 ..."
"... 사흘 ..."
하고 병자 부부가 또 한번 이구동성으로 뇌었을 때 공빈의 처소에서도 임금이 지켜보는 속에서 양예수가 병자에게 조신한 어조로 자신의 의술의 지식을 피력하고 있었다.
"습한 바람과 찬 기운 또 눅눅한 공기가 모두 사람의 몸을 해치는 기운인데 풍이란 기운과 혈이 허한 곳에 달겨드는 법올시다."
"더구나 사냥을 나가 말을 타고 달리며 갑자기 땀을 내고 또 짐승을 쫓느라 야심한 산속을 헤매는 일들이 다 몸의 준비행위 없이는 조심해야 할 행동올시다. 게다가 한기를 쫓느라 술을 마시는 것은 잠시 몸을 따습게 할 순 있으되 술이 깨면 더더욱 한기가 심해지니 산속에서 한기를 술로 쫓으려 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이미 지난 실수야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 이런 증상이 나타난지는 며칠이나 되었는고 ?"
병자가 손수건으로 돌아간 입을 가린 채 말을 못했고 공빈이 상감께 대신 아뢰었다.
"오늘이 닷새째 된다 합니다. 처음엔 곧 나으려니 집에서 인근 의원을 불러 대처했사온데 더더욱 입이 돌아가니 그제야 마음들이 급해서 기별을 해왔기에 ..."
혜민서의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나흘이란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제 보기 병을 숨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귀신처럼 아십니다. 그래요, 이 양반 처음엔 턱이 뻣뻣하니 눈이 아프니 하던 게 벌써 열흘도 넘었습니다. 아, 자세히 말씀드리세요, 지발."
"그럼 한 보름 됐나부네 ... 근데 사흘이면 참말 낫겠습니까? 들일도 벌여놓은 게 많구 내가 나서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지금 들일 걱정할 때유. 제발 덕분에 사흘 만에 고쳐주시면 그 은혜 평생 안 잊을 거여요."
"그렇게 하오리다. 핫핫 ..."
선조가 말했다.
"이레면 낫는다니 못 기다릴 기간도 아니다. 어의만 믿고 기다리거라."
"이레 만에 낫기만 한다면 ..."
공빈이 동생을 대신해 또 대답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운명은 또 한번 우연을 만들어 허준의 본모습을 정작의 눈에 띄게 했다.
퇴청한 정작이 집으로 돌아가려 육조 앞 십자로에 이르렀을 때 길 건너 혜민서에 시선이 박힌 것은 우연이었다.
모두 퇴청한 시각이었다.
대문은 육중하게 닫혀 있었고 해진 시각의 혜민서 문전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조용한 모습이었는데 우연히 쪽문을 열고 등불을 든 의녀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자그마한 모습만 보아도 눈에 익은 허준이 있는 침구과의 의녀 미사 알 수 있었다.
정작은 문득 그 미사에게 요즘의 허준의 동정을 묻고 실은 충동에서 혜민서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정작이 혜민서 문이 열리거나 말거나 내다보지도 않는 직숙자를 소리쳐 부르려 할 때였다. 안에서 찢기듯한 비명이 연거푸 났다.
정작이 그 비명을 쫓아 뛰어들어간 곳은 침구과였고 들여다본 그 안엔 겨드랑이의 커다란 종기를 앓는 병자를 눕혀놓고 의원이 야차처럼 달려들어 고름을 빨아내고 있었고 그때마다 종기병자가 까무러치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고함치려던 정작이 걸음을 세웠다. 의원은 허준이었다.
정작의 눈빛이 감동으로 바뀌었을 때 허준과 병자를 둘러싼 이웃 병사의 병자들 속에 구안와사 병자도 정작의 눈에 띄었다.
정작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환자의 고름을 빠는 허준의 처절한 의료 행위도 행위려니와 의녀들 뒤로 멍청히 선 구안와사 환자가 허준의 병자인 건 한눈에 짐작이 간 것이다.
7
"그와 똑같은 병자가 혜민서에?"
우의정 노수신이 열흘에 한번씩 내의원 업무의 진행사항에 대한 의례적인 보고차 들르는 정작에게 흥미있는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그러합니다."
하고 정작이 우연히 꺼내는 말처럼 노수신을 수행하는 친구 채공조에게 향하던 얼굴을 노수신에게 향했다.
"혜민서 병자면 상민 아닌가?"
노수신의 관심이 움직이자 채공조가 대신하여 되물었고 정작이 대답했다.
"물론 상민이지. 그러나 병증이야 신분의 귀천 따라 오는 건 아니잖은가. 병은 똑같네. 그걸 다루는 의원의 솜씨는 매매인이 달라도."
"의원의 솜씨가 매매인이 다르다니?"
"도제조께서도 공빈마마의 동생이 구안와사로 어의의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들으셨사오니까? "
모를 리 없었다. 상감이 공빈 처소에 와 있는 처남을 위로해주고자 어제 그제 연이틀 진숙궁에 납셨고 그 거동 따라 노수신 또한 자신이 겸한 내의원 도제조의 체면으로 따로 어젯밤 임금을 수행했던 터였다.
"한데?"
"저도 우연히 그 양쪽 병자를 보았사온데 너무나 흥미로워서 얼핏 한 얘기올시다."
"흥미롭다?"
"한 사람은 내의원을 대표하는 어의이옵고 한쪽은 신진기예의 젊은 의원이다 보니 우연 그런 장난스런 생각이 났습니다."
"젊은 의원이라면?"
"허준이라고 연전에 과차에 첫등으로 뽑힌 인물인데 몇 가지 자기 모습을 갖춘 준재올시다."
"그래 ... 이름이 무어?"
"허준올시다."
정작이 재삼 그 이름을 댔으나 노수신의 반응이 더 이상 없자 "어느 쪽에 걸겠나?" 하고 채공조에게 정작이 웃음을 띤 채 물었다.
혜민서의 허준을 보고 감동한 것은 자기다. 정작은 오늘까지 그러한 치열한 의료행위를 본 적 없다. 정작은 그 감동을 인사권이 있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이 기회에 양예수의 내의원에서의 독선과 그가 약삭빠르게 쌓아올린 어의의 허상을 허준을 통해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썩은 봇둑을 트고 새논에 새물을 대기 위하여!'
그건 정작 나름의 정의감에서지 결코 양예수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어서가 아니다.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 있는 것.'
비록 벼슬길이 막힌 자기라 할지라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그러한 맑은 기풍이 진작되는 걸 보고 싶은 일념뿐이다.
"걸고 말고가 있나. 양예수를 능가할 의원은 없네."
채공조가 말하자,
"그럼 어의께 거시게. 난 허준 쪽을 택하리, 무슨 큰 내기라기보다 잘못 짚은 쪽이 술 한병 선사하는 정도의 심심파적 삼아서."
"핫핫, 사양 않겠네. 대신 헛짚은 사람은 꽤 좋은 술을 구해야 하네."
"아무렴."
이미 두 사람의 화제에 관심 없는 노수신을 의식하며 정작이 채공조에게 웃었다.
허준의 병자가 갑자기 도시 허준을 믿을 수 없는 의원이라는 듯이 짜증 섞인 얼굴이 됐다.
"돌아간 건 이쪽 뺨인데 왜 자꾸만 요짝 반대쪽에다 침을 찌릅니까."
"혈이 움직이니 자꾸 입놀리지 마시오."
허준이 주의 주자 성깔이 있는지 병자가 불끈했다.
"왜 말도 못하게 하시우. 사흘 기한을 잡았으니 오늘은 벌써 웬만치 나아가는 징조가 있어야 하는데 여직 그대로 아닙니까?"
"병자는 시키는 대로 가만 기소서."
허준을 보조하는 미사가 병자를 달랬으나 병자는 그 미사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또 허준에게 불평했다.
"... 자꾸 침만 찌르고 ... 정말 오늘 해 안으로 낫긴 낫는 겁니까?"
"오늘이 아니고 내일 아침 나절까진 가야 본모습이 돌아오리다."
"내일이면 나흘째 아닙니까. 왜 애초 사흘이라 해놓구선 ..."
"내가 늦춘 적 없소. 애초 사흘 말미를 정했을 때 내 하라는 대로 한다는 약조였는데 그 약조를 어긴 건 당신이오."
"지가 언제 약조를 어겼습니까. 혜민서 들어온 뒤 난 한 발자국도 안움직이고 병사에서 여기만 오갔는데."
"핫핫."
"하이고 이 양반, 왜 못 낫우는 핑계를 나한티 떠밀고 웃기만 하오."
"어제 침 놓을 시각에 맥을 짚어보니 맥이 고르지 않았소. 그건 뱃속에 음식이 가득 들은 맥이었지. 정녕 예서 지시하는 음식 외 딴 음식을 몰래 먹은 적 없소?"
"그야 하도 배가 고파서 마누라 시켜 군것질을 했지만."
"핫핫, 것 보시오. 어젠 그래서 침을 걸른 겁니다. 배부르면 맥이 고르지 못하니 잠시 기다리려 했더니 내가 다시 돌아와 맥을 짚었더니 그 사이 또 무얼 몰래 먹은 맥이었소."
그제야 병자가 두려운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허준이 가짜가 아닌 걸 믿는 그런 눈이었다.
같은 시각 양예수도 발 너머 윗방서 지켜보는 공빈의 주시 속에서 병자의 돌아간 반대쪽 뺨에 침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나 윗방 공빈의 귀에 충분히 들리는 소리로 위엄을 담아 말했다.
"이제 사흘, 이삼 일만 더 견디시오."
"이삼 일이라면? 처음 말씀한 날짜보다 하루 앞당겨지는 겁니까?"
"마땅히 하루 한시라도 빨리 차도를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전하와 마마께오서 연일 걱정하고 계시오니."
"정말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말씀올시다."
발 너머에서 공빈의 감격 어린 음성이 났다.
청년 선조는 무척 부지런한 성품이었고 아침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 꽃잎에 아침이슬이 마르기 전에 대궐 화원을 거니는 것이 그날 일과의 첫행사였다.
화원에 그 때아닌 시각에 진숙궁의 백상궁이 뛰어들어와 잠시 체통도 잊고 외쳤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숙궁에 있는 병자의 양볼이 밤 사이 제자리로 돌아왔사옵니다."
"밤 사이? 그렇게 빨리?"
"처음은 이레로 작정했사온데 어의의 의술이 정말 신기와 같사와 새벽녘 그러한 천행이 있었사옵니다. 하도 반가운 소식이오라 공빈께서 속히 상감마마께 기별하라 하기 달려왔사옵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로고."
"하와 공빈과 병자가 어의와 함께 이리로 오고 있는 줄 아옵니다."
수행했던 대전별감과 내시들이 상감의 관심을 대신하여 화원 입구로 내닫고 벌여서다가 경사방대감(내시의 제일 윗자리)이 외쳤다.
"공빈과 어의가 입내하고 있사옵니다."
선조의 용안에 기쁜 화색이 돌았다.
곧이어 공빈이 제 얼굴을 찾은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고 뒤따라 의기양양함을 안으로 감춘 양예수가 나타나 임금께 허리를 굽혔다.
"정말 어의는 애썼소."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힌 그때였다.
무어라 감격의 치사를 선조에게 하던 병자가 갑자기 턱을 떨며 방금 온전했던 얼굴이 다시 흉하게 일그러졌다. 주위가 놀라고 공빈이 비명을 질렀다.
"또 왜 이러느냐. 새벽내 기뻐 날뛰면서 온전하더니."
양예수가 다급하게 병자를 부축하며 당황히 변명했다.
"아직 좀더 차도를 보아야 한다 했사온데 속히 전하께 아뢴다 하더니 ... 아직 새벽 공간이 습한 기운이 찼사와 ... 하오나 이미 본모습이 거의 돌아온 증거올시다. 하루이틀 안에 꼭 본얼굴을 찾을 수 있사옵니다."
선조가 조용히 응대했다.
"병은 뿌리까지 뽑아야 진실로 나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급히 굴지말고 천천히 낫우도록 하오."
울상이 된 공빈이 동생을 다시 부축해 화원을 떠날 때 선조가 양예수에게 분부를 보탰다.
"잘 구완해주오. 공빈의 얼굴을 보니 동생의 병으로 인해 얼굴이 반쪽이 되었소."
"앞으로 이삼 일이면 기필코 온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사오니 성려를 거두오소서."
끄덕이는 선조께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인 양예수가 공빈 처소로 뒤따라갔다.
그로부터 반 시각쯤 후에 혜민서에 하나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 소세를 마친 병자가 미사가 내미는 면경 속에서 기적같이 돌아온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고 그 거울 속 자기 얼굴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제 뺨을 잡아당기고 또 반대쪽으로 잡아당기며 하다가 돌연 내 얼굴 돌아왔다고 혜민서가 떠나가라 고함고함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8
이젠 내 병이 다 나았다고 길길이 뛰는 구안와사 병자를 보며 혜민서의 여타 병자들이 부러움과 축복을 담아 손뼉을 쳐주건만 허준의 대답은 냉담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제 잠시 제 얼굴이 돌아왔다 하나 다음 조목들을 깊이 유념하고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다."
"그게 뭔데요?"
"우선 진정하고 내 얘길 들으시오."
"그럼 아직 덜 나았단 말인가요?"
남편보다 더 똘똘해 보이는 병자의 아내가 나섰다.
"허의원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꼭 그대로 지키도록 하겠으니 그 조목들을 일러주세요."
"건네주어라."
하고 허준이 미사에게 이르자 미사가 준비한 언문 종이쪽지를 병자의 아내에게 건넸다.
그러자 펴보던 병자의 아내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로 허준과 미사를 쳐다보았다.
"... 어쩝니까 ... 저도 아이도 눈만 떴지 글은 읽지도 못하는 청맹과니들인걸요 ..."
"돌아가면 마을에 언문쯤 깨친 사람들은 많을 게요. 그러나 당장 볼 줄 모른다 하니 대충 내용을 일러주리니 귀담아 들으시오."
병의 회복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마 하자 구안와사와 상관이 없는 병자와 가족들까지 허준을 둘러쌌다.
허준이 다음 사항을 찬찬히 일러줬다.
첫째 처음 한 달은 밤이슬을 맞거나 젖은 옷을 입지 말 것. 특히 우중에는 결코 나돌아다니지 말 것. 또 과도히 땀을 흘리거나 방사도 삼갈 것.
구경꾼들이 와르르 웃었다.
둘째 향후 두 달 동안 음식을 가리는데 비린내나는 생선, 굴수, 술, 식초, 닭고기, 돼지고기, 그밖에 맵고 짠 음식을 열거한 다음 덧붙여서 명심시켰다.
"이 일곱 가지 음식은 비단 구안와사뿐만 아니라 모든 풍병에 조심해야 할 음식임을 염두에 두시오."
"술은 한잔도 안됩니까?"
병자가 그것만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고 구경꾼의 웃음 따라 허준도 웃었으나 곧 정색해 말을 이었다.
"음복술도 아니 되오. 처음에는 괴로울 것이지만 가히 이 약조만 지킨다면 같은 병증으로 다시 이곳에 찾아올 일은 없을 거외다."
아직도 좀은 억울한 사내의 허리를 찔러 그 아내와 아이들이 허준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잘 가거라."
허준이 병자의 두 아이에게 미소지었다.
양예수를 위시 공빈과 그 아우 김병조가 병이 나았다고 상감에게 하례차 몰려갔다가 병이 재발하여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작은 고개를 저었다.
양예수는 그렇게 서투른 사람이 아니다. 필시 그건 사가의 신분이면서 누이의 배려로 궁안에 들어와 언감생심 상감의 관심까지 받아가며 어의의 치료를 받게 된 그 황공무지함을 모르고 진득하지 못한 성격대로 잠시 돌아온 얼굴을 자랑하고자 달려나갔다가 벌어진 소란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김병조의 병이 재발되었다는 소식에 정작의 가슴속에 지나간 건 아쉬움이 아닌 안도의 감정이었다.
유의도 의원이다. 비록 자기의 소임은 양예수를 비롯한 문식이 모자란 의원들과 혜민서 제조와 내의원 도제조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탕약화제를 의논하며 의원들의 비망기를 정리하고 또 새로 수입된 외국 의서의 번역 등이 소관일지라도 한 사람 의원의 자격과 양심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왜 없으랴.
그러나 자기의 이상의 세계를 펼쳐보고자 어렵사리 찾아갔던 혜민서 제조 정종영은 분명한 실수를 저지른 바 없는 양예수를 굳이 문제삼으려 할 기색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자기를 만류했었다. 또 엊그제 찾아간 도제조 노수신도 정치의 세계와 멀리 떨어진 내의원 인사에 관한 화제쯤 귀에 담는 기색이 아니다.
"그 아이 이름이 허준?"
하고 잠시 관심을 보인 이외에는 ...
양예수가 재발한 김병조를 놓고 임금 앞에서 앞으로 사나흘의 말미를 다시 제시했다면 그건 애초 양예수가 제시한 '이레'를 넘기는 날짜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아직 아무 책잡힐 다짐을 한 적이 없다.
허준의 병자가 이미 성한 얼굴을 되찾아 혜민서를 떠난 것을 알지 못한 채 정작이 혜민서로 향하고자 진숙궁을 나섰을 때였다.
그 정작의 눈에 공빈의 생부 김희철과 형조참판 유자신(후에 광해군의 장인)이 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20이 채 안된 청년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청년은 지난 나흘 동안 조석으로 병조의 병을 문안오는 청년으로 공빈도 임의로운 동생 대하듯 대우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었다.
같은 사내로서도 한번쯤 더 돌아보게 하는 이목이 수려한 그 젊은이의 성명이 이이첨이란 걸 안 것은 진숙궁 궁녀들이 넋나간 듯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또한 어의 양예수가 시술에 방해가 되니 문병객들은 협실로 물러가 달라 했을 때 김병조가 나와 친동기간 같은 벗이니 이 사람일랑 놔두오 하고 감싸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이첨뿐 아니단. 김희철을 따라 친구 자식의 병문안 오는 유자신을 위시, 요즘 부쩍 권문세가들이 한낱 백면서생인 병자에게 위로와 문안을 핑계한 진숙궁 출입을 자주 했고, 이들을 적잖은 사람들이 비아냥 섞인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 다 나아서 돌아갔어?"
전작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이공기에게 물었다.
"제 눈으로 분명 보았습니다."
"온전한 제 얼굴을 되찾고서?"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나았다 할 수 있으리까."
"흠 ... 며칠 만인가?"
"나흘 만올시다."
"나흘."
"소인의 기억으로는 그러합니다. 허봉사를 부르올지?"
"어디 갔는가?"
"점심 나절에는 병자들이 밀리어 이제야 허기를 때우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올시다.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리. 그저 잠시 지나가다 들른 것뿐인즉."
이어 정작이 본원 높은 상사가 왔으므로 하던 일을 젖히고 몰려선 혜민서 의원들을 돌아보았다.
"가 소관들 보시게. 온 김에 난 잠시 병자들 안색이나 보고 가리니."
타동 의원들이 흩어져갔고 이공기가 정작을 안내하여 침구파로 향하는데 미사의 전갈을 받았는지 허준이 급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를 궁금해 찾아왔으면서도 정작은 반가운 낯빛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근자 그대가 다룬 병 환자들에 대한 비망기를 보여주게."
순간 미사도 이공기도 긴장했다.
혜민서의 약재를 빼돌려 집에서 쓴다는 오해를 받은지 오래지 않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곧 허준이 비망기를 가져다 보였다.
어의의 오해를 받은 이후 출납하는 일체의 약재의 근량을 직접 기재하던 그로서는 언제 누가 무엇을 보자 해도 당황할 까닭이 없었다.
"문자는 언제 이 정도 익혔던가?"
뒤적여가던 비망기가 구안와사 병자에게서 멎은 채 정작이 문득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부드러운 눈및에 이제야 미사가 남모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사는 이미 허준의 숭배자였다. 허준의 의술의 경지는 다 짚어볼 길이 없으나 환자의 고름뿌리를 입으로 뽑아내던 허준을 보며 이제 초조가 시작된 소녀 미사에게 허준의 존재는 하늘 아래 둘도 업는 이성의 대상으로 비치고 있는 것도 요즘의 변화였다.
어의 양예수가 방안에 몰려와 있는 고관대작들과 발 너머의 공빈을 의식하며 의에 관한 고담준론을 꺼내고 있었다.
"옛날 누르 황자 황제가 의성 기백과 문답한 고사가 있사온데 그 내용이 풍병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입 돌아간 것도 풍이라 보오?"
"당연 합니다."
유자신이 물었다.
"어떤 내용이오?"
"황제가 묻기를 본시 사람의 몸이 급작히 뒤틀리면 죽기도 하고 오래 끌기도 하며 쉽게 낫우기도 한다 하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에 기백이 답하여 왈, 몸이 뒤틀리는 증세가 장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으며 골수에 침범하면 오래 끌며 살갖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면 쉬 고칠 수가 있습니다."
순간 방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병자에 관해 생사의 얘기가 나오자 공빈이 체통을 버리고 발을 들치고 대청으로 나와 선 것이다.
아비 김희철을 비롯, 방안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 경의를 표했다.
홀로 일어서지 않은 것은 어의의 체통을 지닌 양예수뿐이었다.
공빈이 외쳤다.
"하오면 그 아이의 병이 지금 어디에 어느만치 침범했사오니까!"
공빈의 젖은 눈을 본 채 그러나 양예수는 잠시 대답을 늦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양예수의 타산 어린 침묵이 길었다.
입은 화도 복도 불러들이는 인간의 됨됨이를 불러들이는 구멍이다.
왕조 삼대의 어의를 꿈꾸는 그의 필생의 꿈.
태산반석과도 같다 여겼던 양예수의 자만 어린 권위가 골수의 병 운운한 그 과장된 한마디로 인해 마침내 소리내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9
김병조가 울음을 터뜨렸다,
"난 얼굴이 이런 꼴로는 살지 않겠어. 차라리 이런 모습으로 살 바에는 비상이라도 먹고 죽을게요."
공빈이 따라서 울음을 머금었고 김희철이가 일순 아비로서의 엄한 호통을 쳤다.
"궐내에서 죽느니 사느니 이 무슨 무엄한 언동이냐!"
양예수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아직 손쓸 길이 있으오리다. 이 양예수 전조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왕실의 온갖 병을 퇴치했으며 완쾌시켜온 터이니 소직을 믿으소서, 반드시 수삼 일 안으로 병세를 돌이키고 병을 낫우어 보이오리다 ... 반드시!"
"어의의 말씀만 믿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어의의 말씀만."
김병조가 다시 울먹였고 양예수가 그 아름다운 수염의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여 주는 양예수의 내심은 지금 달랐다.
'명문세가의 떨거지들?'
양예수뿐 아니라 내의원 의원들에게 있어 그 문신들을 향한 포한은 깊다.
내의원 의원들에겐 출세의 한계가 판관이라 불리는 종오품이다.
출신이 양반이면 그 종5품직은 현감의 직첩으로 한 고장의 사또로 군림할 벼슬이되 내의원 의원 출신의 종5품직은 한낱 자기 혼자의 명예요 더 이상의 출세를 가로막는 건 조정 대신들이었다.
설사 임금의 병을 완치시키는 공을 세웠다 해도, 그래서 왕명으로 그 공 있는 의원에게 가자(승급)의 영이 내려도 그 품계가 종5품 이상의 반열에 해당할 경우 출신의 미천함을 들어 마치 세상에 큰 이변이나 난 듯이 외람되다 어떻다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것이 조정 백관들인 것 이다.
설사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라 재차 어명이 내려도 이 신분문제만은 붕당의 동서가 일치단결하여 가로막고 반대하는 금기사항으로서 재차 삼차 오차의 반대상소로 이어지기 마련이라 결국은 그 아우성을 귀찮게 여긴 임금이 벼슬 품계의 승진 대신 말 한필 옷 한벌 따위의 은사로 낙착되기 마련이었다.
'그 신분의 멸시를 깨야 하리! 그건 이 양예수말고 누구리요.!'
진숙궁에서 어의의 언동이 어쩐지 못마땅했던 형조참판 유자신이 적선방에 있는 형조에서 퇴청해 나가다가 우의정 노수신의 행차와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땅거미가 끼는 그 시각이면 퇴궐하고 퇴청하는 고관대작들이 대궐 주변에 범람하여 그 벽 소리에 일일이 피해 서고 허리 굽히기 귀찮은 소소한 관리와 주민들은 아예 그 시각엔 대궐 언저리에 나다니기를 기피하며 현란한 청사초롱을 앞세워 오가는 두 사람의 행차는 그 텅 빈 거리에서 멀리서도 서로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예만 오가고 지나칠 유자신이었으나 상대가 내의원 도제조라는 것이 생각났고 또 자신이 임금의 장인인 김희철과 막역한 친구며 오늘도 공빈 처소에 다녀온 것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났다.
육조를 두루 거친 온화한 인물이며 시임 우의정이되 곧 좌의정에 승차하고 멀잖아 영의정 감으로 온 조정이 주시하는 노재상께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켜 두고 싶기도 했다.
유자신이 공빈 처소에서 본 일들을 말하고 상감도 납셨었다는 얘기와 구안와사의 병이 그토록 어려운 병인 줄 몰랐다는 얘기에 노수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왕자 없는 왕실에 아무리 두 왕자를 낳고 상감의 총애가 지극하다 할 지라도 그걸 빙자하여 친정 아우를 불러들여 어의의 의술까지 빌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노수신이었다. 또 자기도 알아본 바 구안와사쯤 여항의 의원들일지라도 고쳐내는 환증인데 그만 일로 성총을 어지럽히다니 양예수의 과장도 너무한다 싶은 것이다. 노수신은 행차를 돌렸다.
유자신의 말대로 이 시간 상감이 진숙궁에 납셔 계시다면 내의원 도제조로서 모른 체 집으로 갈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 노수신이 임금이 거동해 곕시는 진숙궁으로 향할 때 마주친 것이 정작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노수신은 그 정작에게 방금 듣고 온 병자의 용태와 함께 구안와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물었다.
한 시각 후 ...
임금에게 풍병에 관한 여러 위태로운 병증을 세세히 설파하고 또 공빈의 간절한 부탁을 등뒤로 하여 내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예수는 하늘에 솟아오르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결과를 극적인 감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김병조의 증세를 과장한 것이 주위에 먹혀든 것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사나흘이라 적당히 흐렸으나 오늘밤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가 밤샘하여 내일 아침 나절에는 병자를 낫우어낼 생각이었다. 잔뜩 겁을 주었고 사나흘이라 말로리를 흐렸는데 내일 당장 병자가 온전한 얼굴이 되어 있다면 자기의 의술에 대한 성망은 궐내뿐 아니라 온통 도성 안으로 번져나가리라.
그리고 공빈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은인으로서 또 장차 세월과 함께 보좌를 향해 자라가는 임해, 광해 두 왕자에게도 외숙의 어려운 병을 낫운 명의로서 두고두고 기억되리라.
삼대를 이어내릴 자신의 어의로서의 찬란한 꿈이 이제야 확실하게 자기 손안에 잡힌 감격이 그의 가슴에 출렁거렸다.
... 어디서 뜨르르르 ... 여치의 맑은 울음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이건!"
양예수가 정작이 내놓은 비망기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건너보았다.
"혜민서 허준이 제 손으로 적은 시술기올시다."
"허준?"
"혜민서 기강이 잡히고 근자 그의 인술에 관해 제법 칭송이 자자합니다."
"병 낫우는 의원이 칭송받는 것은 혜민서 전체 의원들의 명예지 왜 유독 허준을 내세우는가."
"그대가 허준의 어디를 보고 그를 찍어서 말하는지 모르나 편애하지 마시오. 본시 덜 영근 의원들이란 헛소문 내길 좋아하는 것들이오. 한때 이목을 끄는 일은 점쟁이들도 하는 짓거리들인즉슨!"
대화를 포기한 정작이 시술기의 한 대목을 접어 말없이 내밀었다.
"혜민서에서 허준이가 다룬 병자 중에 구안와사 병자가 있었는데 그를 낫우기까지 사용한 약재와 세세한 시술내용올시다."
"구안와사 병자?"
"하루를 허비하고도 나흘 만에 완치한 내용올시다."
"완치?"
"그러하오."
끼여들던 김응택이 입을 다물며 반사적으로 어의를 돌아봤다. 양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병자도 병자 나름, 병명이 같을지라도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시술 대상이 다르고서야 어찌 나았다 안 나았다 기일이 화제거리일 수 있소?"
대답 대신 정작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걸 보고야 당황한 양예수가 말을 이었다.
"진숙궁 환자는 내가 낫우어 놓을 게요. 그대도 아다시피 이 양예수가 주상전하께서 관심하는 병자를 못 낫운 일이 있었소?"
"왜 그러오!"
정작의 침묵을 향해 양예수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니 그럼 이 양예수가 미리 고칠 수 있는 병을 일부러 미루고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렇겐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소임은 전하께오서 관심하는 병자가 있을 경우 병세가 어떠하며 어떤 의원이 필요하다는 걸 어의께 천거한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진숙궁 환자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것뿐올시다."
"그대에게 천거할 의무가 있다면 내겐 그 제안을 아니 들을 권한도 있네. 아시는가?"
"아옵니다."
"안다?"
눈과 눈이 마주쳐 불꽃을 튀겼다.
"도제조와 만나겠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를 간파한 양예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정작이 여전히 앉은 채로 나직이 일렀다.
"도제조께선 지금 진숙궁에 가 계십니다."
"진숙궁엘 왜 ..."
"도제조께서 전하께 주청하여 허준이 이미 공빈마마의 처소에 가 있는 줄 아옵니다."
"무엇이!"
양예수의 안색 속에서 핏기가 걷혀갔다.
그때였다.
어의의 방 앞으로 급히 닥친 목소리가 큰소리로 아뢰었다.
"어의께 아뢰오. 혜민서로부터 전갈이 왔사온데 좀 전 도제조께서 기별을 보내어 봉사 허준과 의녀 하나가 진숙궁으로 문안을 갔기로 아뢰옵니다."
방문을 박차고 나온 양예수는 이미 급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행자를 부를 사이도 없이 공빈 처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10
궁정을 가로질러 오던 양예수가 걸음을 세웠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일을 꾸민 것은 저 정작이다.
그 말고 도제조와 제조를 유인할 인물이 누가 있을까.
저 정작의 자기에 대한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 내의원의 인사에 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를 무시하지만 않았던들 그와의 갈등은 이처럼 심화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걸 후회한들 늦었다. 아니, 늦고 말고 이전에 그가 천거한 인물이 허준인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애초 허준 따위로 심사가 틀렸던 게 아니다. 자기 또한 전도 촉망되는 새 아이를 곁에 두며 기르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하나 파장에서 첫등으로 뽑힌 그 발군의 시험지를 제출한 청년이 다른 사람 아닌 유의태의 입김을 씌운 수제자임을 알았을 때 그 기대는 증오로 변하던 것을 어쩌랴.
'헌데! 헌데!'
엉뚱하게도 유의 정작이 허준을 업고 나선 것이다.
을사사화의 삼간의 하나로 지목되는 아비로 인해 몰락한 집안이로되 출세와 영달의 길에서 멀리 비켜선 내의원 판관인 그에게는 아직도 한때 정승의 자식이었다는 동정과 경원에 싸인 눈이 많고 더구나 그는 자기의 인사권한 밖의 문관이고 또 그가 어엿한 양반 가문의 인간임에서 비록 직급은 자기의 하급자로되 자신의 임의로 어쩌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착잡한 감정에 부글거리며 진숙궁 수석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던 양예수는 아차 숨을 삼키며 걸음을 세웠다. 오늘도 상감이 납셔 계셨다.
상감을 호종해온 대전별감과 내시들의 일행이 보였고 막 그 안쪽에서 이미 납셨다가 돌아가는 모습의 선조를 따라 공빈 그리고 도제조 노수신, 혜민서 제조 정종영 등이 따라나오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양예수가 재빨리 황공한 모습으로 다가갔으나 잠시 시선이 날아왔을뿐 선조는 공빈의 말만 경청해 듣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 하와 직시 본곁 식구들로 하여금 혜민서 젊은 의원이 낫우었다는 병자의 마을로 찾아가게 하였삽더니 틀림없이 허준이란 의원의 시술로 나흘 만에 말짱하게 낫운 사람을 확인했사옵니다."
"흠 ..."
"소인도 남의 말을 쉬 듣는 쪽은 아니오나 같은 병인데 한쪽은 어려운 말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토록 쉬 낫우었다니 제가 애써 노정승께 청하여 저 허준이란 의원을 불렀습니다."
"병을 낫우는 것은 때로 약일 수도 있고 솜씨일 수도 있소만 아무튼 성심도 있고 술도 정예하다면 그 의원이 공빈의 근심을 쉬 덜어줄지 모르겠구먼."
사랑하는 여자의 수척한 모습을 돌아보며 선조의 미소 어린 얼굴이 그렇게 태평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공빈이 그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양예수는 다급했다. 역시 임금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노수신과 정종영에게 급히 다가서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혜민서 제조 정종영이었다.
"그러잖아도 정청으로 가 어의를 만나보고자 하던 터요만 이미 얘기를 들었소?"
"따로 하문하실 얘기가 계셨사오니까?"
"공빈께서 아우의 병으로 인해 노심초사하고 전하께오서도 자주 심병하시는 터라 미상불 나 또한 괘념치 않을 수 없던 터에 마침 정판관 말이 우리 혜민서의 봉사 하나가 구안와사를 낫우는데 남다른 솜씨를 지녔다 들리기로 데려와 병자를 보였소이다."
"저도 막 기별을 들었습너다. 잘하시었습니다."
"잘했다니? 난 어의가 기왕에 시한을 두고 맡은 병자라고 들었기에 어의가 손을 놓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성급하니 좀더 기다리자 이의를 내던 차요만."
갑자기 양예수의 말이 유창했다.
"구안와사는 병이 아니올시다. 임부는 병자가 아니듯이 그건 보할 것 보하고 사할 것 사하면서 참고 기다리면 반은 절로 낫는 하나의 증올시다."
"증?"
노수신이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구안와사는 풍이노라. 그리고 공빈과 병자에게 병이 골수에 침노했느니 해놓고 이제 와선 무슨 엉뚱한 소리요?"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풍은 풍올시다."
"헌데?"
"구별을 하면 엄연히 풍병임에 틀림없으나 또 골수 운운은 작은 병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병이 되는 것이라 ... 그런 뜻에서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옵고."
"이보오!"
"정말 더 들어보소서."
갑자기 노수신의 어조가 카랑했다. 문득 그 눈빛이 국징을 논단하는 우의정의 관엄한 안색으로 바뀌고 있는 걸 양예수는 보았다.
"신하의 언사는 분명한 것으로 기본을 삼는 법인데 주상전하께오서도 관심하옵시는 병세에 어찌 힘부로 과장이 있을 수 있소."
"과장이 아니오라 말씀드렸듯이 ..."
"됐소, 그만하면. " 노수신의 불쾌한 얼굴이 혀를 찼고 정종영이 무마하듯이 말했다.
"병자가 왕실 사람도 아니고 보매 사전에 의약상정까지 안거치다 보니 말이 와전된 듯합니다. 좌우간 기왕사 새로 부른 아이로 병자를 맡게 하겠다는 것이 공빈마마의 뜻이니 이번 일은 허모라는 그 아이에게 그대로 맡깁시다."
"제가 낫우마 기한 둔 날짜가 아직 닿지 아니했습니다만."
"이미 공빈께서 그 사람으로 작정한 모양이외다. 새삼 논란할 일 없소이다."
양예수의 발밑이 휘청했다.
떨어져 있던 정작이 다가서 왔다. 어조는 조용했으나 양예수를 향한 눈빛은 냉랭했다.
"어의께서 골수에 든 병 운운하신 후 공빈께서 하도 비통해하시기에 제가 위안의 말을 아뢰는 뜻으로 일전 혜민서에서 허봉사가 같은 병을 고쳐낸 사례를 전해 드렸사온데 이에 그 허준에 관해 하문 곕시기로 제가 아는 대로 허준에 관한 몇 가지 소문을 말씀드렸습니다."
"몇가지 소문?"
"연전에 제 취재길 버리고 연로의 빈한한 병자들을 돌보아준 일, 그밖에 혜민서에서 종기 환자를 제 친동기간에게 대하듯 헌신하던 일, 또 퇴청 후엔 인근 마을의 병자들을 돌보아준다는 그런 사실들올시다."
양예수의 아름다운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일세."
"과장이 아니라 제가 직접 목격한 일과 확인한 일들만 골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하셨소. 허나."
"허나라니요?"
"진실로 의원이고자 하는 자라면 그만 일을 무에 소문낼 거리가 되오?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하고 도제조가 계속했다.
"그리고 의업에 그 정도 굳센 심지를 지닌 아이거든 진작 내국(궐내 약방)에 불러들여 궐내 제반 법도에 익숙케 하고 또 윗분들의 정시입진(7일에 한번) 때 수행케 하여 눈과 귀를 열어줘야 한다 여기오만, 과차에 첫등까지 한 아이라면서 어째 혜민서에부터 내보냈소?"
양예수가 웃음부터 보였다.
"그건 제 욕심올시다."
"무슨 욕심?"
"일시 취재 성적이 뛰어났다 하여 내국에 불러들여 놓으면 젊은 나이에 교만하기 십상이옵고 또 혜민서에서 직접 여러 병증에 관한 임상의 체험을 쌓게 한 연후에 데려다놓으려는 제 나름의 깊은 포석올시다. 하하하!"
정작의 눈이 치떠졌으나 양예수가 또 한번 웃고 있었다.
"어의께서 듭시옵니다."
하고 방문 밖에 대령해 있던 미사의 맑은 음성이 났다.
엎드린 병자의 목 뒤와 어깻죽지의 구석구석을 압진하고 있던 허준의 귀가 열렸다.
진찰할 때, 맥 짚을 때, 약 지을 때는 어떤 상전에게도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의원의 특권이다.
방문이 열리고 양예수가 들어섰다. 병자의 친구 이이첨이 일어서 예를 표하여 맞았고 허리를 일으키는 허준에게 양예수가 일렀다.
"멈출 것 없다."
허준이 김병조에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압진을 계속했다.
순간 양예수는 '앗!' 소리를 내지를 만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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