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5일 수요일

신촌 이미지한의원 추천책 잠못드는 밤을 위하여

5월 8일
신의 은총으로 인하여 마음 깊이 느끼는 기쁨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적이나 우리에게 부당한 짓을 한 사람을(이런 사람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그 기쁨을 갖는 것이 신의
눈에도 참으로 정당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된다. 마태복음 18:21-25

5월 9일
인생의 도상에서 가끔 만나는 가장 불유쾌한 것의 하나는 질투이다. 이것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시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간해서 달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하고 착실한 활동에 의해서 차분히 이에 대항할
수는 있다. 괴테가 한 말로 기억되는데, 약간 가슴을 때리는 격언이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질투를 박살내고 싶거든
턱없는 재담을 하지 말라.
그러나 또 우리는 자신의 장점이나 소유물 따위를 일부러 과시하여 남의
질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 그런 짓을 하면 이웃 사람의 마음을
크게 상처 입히는 발단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분노>의 저주를 받게 된다.
특히 여성은 이 점에서 잘못을 범하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약혼자,
남편, 아이들, 장신구, 방문, 즐거운 가정 생활 등을 이것들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의 성격 중 가장 추한
면의 하나이다.

5월 10일
종교의 비결은, 이론상은 아주 간단하다. 즉 신을 진정으로 믿고 이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려 들면 훨씬 어렵다. 기독교의 세계는
이미 1900년 동안이나 그것을 연구해 왔지만 아직도 충분히 그것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이미 무수한 학자들이 그것을 해설하려고 꾀했는데도 그것조차 성취하지
못했다. 누가복음 10:27
시편 제 1편 및 제 2편. 신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신앙을 스스로
강하게 느낀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지극히 쉽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쇼펜하우어나 니체에 이르기까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신을 부정함으로써 일시적인 인기를 누려 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같은 신의
존재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대중은 물론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단순한 부정적인 증명으로(그것은 원래 증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신을 안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또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태교나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그 뒤에 그에 못지 않은
영속성 가지고, 현명한 사람들에게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나 모두 한결같이
유익한,
또 어떤 경우에나 충분히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세계관을 세우는 것도 역시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그와 같은 새로운 건설을 시도하려고도 않고
다만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실제로 이같은 파괴가 다가올 시대에 있어서
영속적인 성과를 낳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건설적인
기독교를 절실히 요망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4:35

5월 11일
이미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그의 유명한 논문 (철학의 위안) 속에서
인간은 신에 생명에 힘입음으로써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후 약 1500년이 지났으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정은 변함이 없다.
그 점에서 특히 고마운 것은 신은 인간과 같이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형식적으로 신에게 접근한 것만으로 어두운 마음에 햇빛을
불러들일 수는 없다. 그리고 또 종교적 열광이나 흥분으로써도 이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신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것들과는 아주 딴 것으로
오히려 아주 독특한, 조용하고 평화에 충만한 감정이다.
출애굽기 34:6 열왕기상 19:12
더욱이 이 감정, 즉 신의 가까이에 있다는 기쁨은 온갖 인간적 감정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것이다. 즉 이 감정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만족시킬 뿐
아니라, 또 온갖 제한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고 앙양하는 효과로 보아서
우정이나 그 밖의 감정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것이다. 가끔
인용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그것이 아주 진실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서
좀더 중요한 보충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강한 힘을 가진 감정은 반드시
실재의 대상으로부터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스스로 이 감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 아무런 증명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들로서는
이 감정을 미처 몰랐던 과거의 나날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5월 12일
인간은 신에 대해서도 자유 의지를 가지므로, 그로써 신을 거부 할 수도
즉 신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고의로 끊을 수도 있다.(욥기 2:9) 그러므로
은총의 선택이라는 것도 신을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선한 사람들조차 그것은 가능하다. 구약의 다윗도 예컨대 만일 그가
왕자로서의 권력 의식을 가지고 예언자 나단의 질책을 물리쳤다면 신을 거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우리 주님에 대해서조차, 누가복음 제 4장이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면, 역시 그와 같은 가능성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한 번 가졌던 신을 다시 잃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의 하나로서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많은 수수께끼 같은 현상, 특히 신경병이나
광기의 상태는 여기에 그 근원을 갖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하라. 오히려 신과 맺어진
실을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결코 끊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5월 13일
킹슬리의 매우 아름다운 말에 사람의 마음을 보고 자비를 가져라. 행동만을
보고 꾸짖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신의 가르침과도 같은,
바른 인간 지식을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이 말은 어느 법정에나 걸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심정에서 나온 것이 아닌 행위를 높이 평가하지
말라 고하는 것도 역시 진실이다. 이것은 역사 교실에 써 붙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몸 전체가 밝아지면, 즉 순 동물적인 것이 아주 없어지면, 그것은
정신까지도 밝게 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다.>하는 말은, 일찍이 육체에 관하여
말씀하신 가장 뜻깊은 것으로서, 장래의 의학에 있어서의 그 기본적 신조가
될 것이다. 누가복음 11:36 이에 반하여 그 성구 앞의 35절(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완전히
밝으리라.)은 철학에 있어서의 주도적 사상이다.

5월 14일
종교상의 일에 있어서는 오직 무한한 성의와 진실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하등
정신이 깃들지 않은 온갖 형식주의, 이를테면 건성으로 하는 식탁에서의 기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일, 마지못해 하는 가정예배 등은
신앙에 유익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롭다. 이른바 신앙심이 깊은 가정의 대단히
많은 아이들의 경험이 이것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5월 15일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것은 허영심이다. 그 누구나, 가장 단순한
사람조차도 상대의 허영심을 냄새맡는 정확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상대의 허영심의 그늘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에만 기꺼이 복종하는 것이다.
허영심은 항상 눈에 보인다. 게다가 다른 악덕은 그래도 찬미자를 찾아볼
수 있는데, 허영심만은 누구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 따라서 허영심은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덕 중에서도 제일 바보스러운 것이다.

5월 16일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가장 기분좋고, 가장 유효한 것은, 차분하고 항상
변함없는 친절이다.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아니 온갖 짐승들까지도 그와 같은
친절에는 민감한 것으로, 특히 상대의 친절이 우연한 변덕인가, 다만 순간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영속적인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식별을
할 수가 있다.

5월 17일
한 사람의 영혼을 올바른 길에서 등을 돌리게 하기란 몹시 힘드는 일이므로,
악마조차도 고상한 동기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데
반하여, 악마의 모든 장난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는 단 한 번만 신을
우러러보거나, 신에게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을 정말로 굉장한
사실이며, 괴테의 <파우스트> 제 1부는 이것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악마의 함정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피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함정에서 벗어나기보다도 쉽다) 이 근소한 노력마저도
하려 들지 않는 무기력한 사람이나 염세주의자가 따끔한 비판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요한 계시록 21:8
당신이 사로잡혀 있다고 느껴지거든 그 사슬을 끊어 버리도록 하라.
사슬이라는 것은 모두, 오직 당신 자신의 힘만으로 끊으려고 하면 단단하지만,
신의 힘에 의지한다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더욱이 신의 도움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얻어지는 것이다. 만일 신의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아직도 당신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까지도 신은 당신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
대개의 경우 당신은 그것을 지나치리만큼 알고 있는 것이지만.

5월 18일
커다란 내적 진보가 이루어지기에 앞서서는 항상 절망으로의 유혹이 따르게
마련이고, 커다란 고난이 찾아들기에 앞서서는 대단한 내적 환희와 힘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즉 신은 이로써 우리를 그 고난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기 전 만큼 불행했던 때는
없었으며, 또 가장 어려운 일에 부닥치기 전 만큼 기쁨과 굳센 힘에 충만된 일도
없었다.
간혹 당신이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또는 기분이 언짢은 때는 즉시 진지한
일에 손을 대도록 하라. 만일 그것이 하기 어렵거든 누군가에게 (복음서의
이른바 이웃에게)조그마한 기쁨을 선사하도록 하라. 이거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이 보통 모두가 하듯이 무슨 향락이나 기분전환으로써 음울한
영을 떨쳐 버리려고 하는 것보다도 훨씬 유효하다. 그런 속임수를 쓰더라도
이 영은 이내 또 되돌아오는 것이니까.
타인의 경우에도 요란한 훈계나 설득을 통해서 보다는 약간의 선물이라도
해 주는 편이 도리어 음울한 영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방법이 된다.

5월 19일
<높은 존경>을 받는 것은 왕왕 자기개선의 길에 장애가 된다. 부스 부인은
그 편지의 하나에서 이것을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저주>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세상의 화제가 되거나 이론의 씨가 될 만한 이상한 짓, 색다른 짓 따위는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세상의 구설은 날카로운 메스로서, 이것에
걸려들면 우리가 모처럼 얻은 좋은 평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명예를 회복하는 데 보다 큰 힘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생활의 이 제 2의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새로이 신의
도움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높은 존경을 받는 데 대한
보상은 범용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만은 조금도 과장없이 말할 수가 있다.
동포교회 찬미가 282번 343번

5월 20일
우리의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사실>로서, 우리의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바야흐로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을 이끄는 길은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다.<너희 믿음대로
너희 몸이 되라(마태복음 9:29)> 믿음이 많은 사람은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모든 고난은 그것이 나중에 현실로 나타났을 때보다도 그 전에 상상하던 때가
더욱 곤란하게 생각된다. 그리스도조차 그가 제사장이나 로마의 법관앞에
나아갔을 때보다도, 아니 모르면 모르되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보다도, 붙잡히기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때에 가장 큰 괴로움을 느꼈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가
망설이고, 양보와 굴복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도
겟세마네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5월 21일
진정한 성심이란 신의 뜻을 항상 기뻐하고, 소탈하게 더욱이 마치 자명한
일처럼 행하고 또 참고 견디는 일이다. 그 밖의 성심은 모두 진짜가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곤란한 것은(아니 좋은 일인지도 모르지만)가장 강력한 신앙
체험은 전연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 또는 그것을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시시한 것, 믿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5월 22일
프리드리히 니이체는 <떠돌이와 그의 그림자> 속에서 <부자와 빈민이라는
인간의 계급은 소멸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니이체 류의 기이한
논법으로 너무도 과격한 말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목적에 완전히 도달한
국가(지금으로서는 그것은 아직 <이상국>에 불과하다>에 있어서는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오늘날의 경우 이 두 계급에 태어나는 것은 불행하다고 평정하게
주장함이 좋다. 이들 계급은 어느 쪽도 각 개인의 도덕적 정신적 발달을
저해하여,
그 결과 그들은 사회 전체에 있어서도 당연히 있어야 할 그대로의 유용한
인간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부자에게
있어서 부는 질곡인 이상 당연히 그것으로부터 몸을 빼려고 결심하거나
(이것은 대개의 경우 쉬운 일로서, 게다가 인생의 참된 기쁨을 잃지 않고도 실행
할 수 있다) 또는 그들이 스스로 그 부를 관리하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자기
생존 중에 그 부를 되도록 바르게 사용하려는 결심쯤은 하 수 있을 터인데,
그와 같은 부자는 거의 없다. 정말로 부는 그들을 포로로 만드는 힘이 있다.
동포교회 찬미가 372번 374번
부와 축복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것으로서, 축복이 깃들지 않은 부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축복은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더라도 손에 넣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힘이며 하사품이다. 축복은 특히 어느 개인에게 그
하나의 특질과 같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고, 또 그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항상 그와 같은 축복이 깃들지 않은 사람을 되도록 피하려 들 것이다. 창세기
27:27-29 민수기 23:19-22 욥기 42:7-9 열왕기하 4:8-10
마태복음 10:13-15

5월 23일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을 현명하게 한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들의
본질과 사물의 실상에 대한 통찰을, 또 사람들을 돕기 위한 가장 바른 길과
방법에 대한 진짜 투철한 통찰력을 부여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 저 일에
대하여 무엇이 가장 현명한 처리인가를 타진하는 대신, 무엇이 가장 사랑의 깊은
방법인가를 타진하는 편이, 대개의 경우 확실히 상책이다. 그것은 후자 쪽이
전자보다도 훨씬 알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랑의 깊은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도, 자신을 속이려 들지 않는 한, 쉽사리 착각에 빠지는
일이 없다. 그런데 재능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다만 현명함만으로는 장래의 온갖
사건을 바르게 예견하고 판단할 수가 없다.

5월 24일
겉보기의 일시적 성공보다도 사물의 결말에 주목하는 것이 보다 높은
지혜이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종교개혁의 어느 선구자가 <나는 마지막에
진리가 승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주의가 이와
같이 아주 비근한 성공을 초월하여 사물을 본다는 의미라면, 게다가 특히
그것이 종교에 근거를 두고 또 적당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최후에 승리를 거두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인생관이다.

5월 25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역대 상 10:22)> 이 말씀은 보통 문자 그대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신에게 몸바친 사람들을 다만 세속적인 생각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의
우정이나 악영향으로부터 지키는 경우도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우정이 신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온갖 적의나 박해보다도
더 손상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10-20
외적인 위험에 대해서는, 시편 91편, 욥기, 이사야 끝쪽의 여러장이, 가장
강력하고 항상 도움을 주는 위안 수단이다.

5월 26일
우리가 마음에 슬픔을 느낄때는 항상 <자아>가 그 책임을 나누어 맡고 있다.
자아를 버림은 항상 그만큼 정신력을 높이는 것이다.
<호소>는 원칙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한다. 인간을 향해 호소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왕왕 타인을 도울 수가 없으며, 또 그것을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이 많다. 게다가 거의 언제나 사람을 돕는 일에 다소간 두려움이나
혐오를 느끼는 것이다.

5월 27일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선인에게는 정의가, 악인에게는 벌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없다면, 그래도 또한 단지 이성적인 근거에서, 사람은 역시 악한 행위보다는
선한 행위를 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되도록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래 살아 보았자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5월 28일
<영혼의 밑바닥에 닿지 않고 다만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외면적인, 짐짓 그러는 것 같은 종교를 갖기보다는 종교 따위를 아예 갖지 않는
편이 아마 나을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시대의 말이지만, 이와 같은 뜻의
말을 이미 그리스도가 가장 통렬한 말씀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태복음 21:31
단지 외면적인 신앙만을 가지고 완전히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보다도 기독교의 커다란 장해이다. 실제로
비기독교도들 중에는 진리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 극히 많다. 그들은 오직,
일찍이 역사적으로 이 기독교의 진리가 확실히 담겨져 있던 그 그릇
(교회적 형식)이라든가, 그 담당자들을 두려워하여 이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좀더 잘 생각해보면, <위의 말은 모두가 개인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말하면,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는
비록 표면적인 기독교의 존재와 실천일지라도 (실제로 현재 기독교는 모두가
그러하며, 또 과거 1900년동안 대체로 그러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그
대신에 나타났을 다른 것에 비하면, 역시 그래도 낫다. 이 점에 대해서도 프랑스
혁명은 하나의 분명한 실례를 남겨 놓았다.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내적 혁명이 최상의 방법일 경우가 아주 많다.
낡은 옷에 새 천을 대고 깁더라도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사회 전체로서
생각하면,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에 의해서 보다는 점진적 개혁에 의하는 쪽이
항상 일이 쉽게 진척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 당시 그와 같은 단절을
피하기 어려운 것을 개탄하고 있었다. 이 단절이 언젠가는 치유되리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지만. 마태복음 23:37-39
이 개인적 혁명이냐 사회적 혁명이냐 하는, 언뜻 보기에 분명한 이율배반이라
생각되는 것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서 해소된다. 즉 실제로는 사회전체가
단번에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진리보다도 우월한 진리를 먼저 자기의 안에 명확히 감득하고, 그리고 나서
이것을 가르침과 실천으로서 개인적으로 표명함으로써 항상 전체의 개혁이
추진되는 것이다
이사야 46:11 예레미야 1:5
이들 개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밀가루 서 말속에 든 누룩
(마태복음 13:33)>이며, 또 루터의 표현을 빌면, <신이 그들을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시는 영웅이며 위인>인 것이다. 현대에는 분명히 과장이라 생각되는
카알라일의 <영웅숭배>, 니체의 <초인주의>, 독일에 있어서의 비스마르크
숭배나 괴테숭배등, 그것들의 근저에조차도 역시 이 세상의 최대의 힘이란
국민의 수나 병력이나 부가 아니라. 성령으로 완전히 채워진 개개의 인격이며
이것은 한 나라에 있어서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올바르고 위안을 주는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5월 29일
기도와 사색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 두 가지가
다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즉, 사색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도는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한 쪽만으로는 양쪽이 다 갖추어졌을 때에 가능한 만큼의 완전한 작용을
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신은, 신의 진실한 자손 모두에 대하여 그들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에, 일찍이 전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레위기 18:2-5에서 고하여 이르신
대로의 것을 하여 주신다.

5월 30일
전체적으로 선한 생활을 해 왔을 경우에도, 그것이 무너지는 가장 위험한
시기는, 이따금 생활이 다소 지루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목표를 결했기 때문에 한도를 넘지야 않겠지만 역시 정신을
마비시키는 관능주의에 타락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심이나 당파심이나
소유욕 속에서 일상의 근로에 결해 있는 자극을 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신앙심을 밑천으로 삼거나, 적어도 그것을 낙으로 삼거나 한다.
인간 생활이, 만사가 다 오직 진실만을 심중에 두고 이루어진다면, 거의가
너무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좀더 바쁘게 만들고
흥분시켜 주는 뭔가 다른 것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 사랑하는 자손들에게, 그들이 이 위험한 인생의 단계를
넘어설 때까지, 생활의 양념으로서 고뇌와 어려운 과제를 내리시는 것이다.

5월 31일
우리는 기쁨보다도 오히려 고통을 사랑하고, 드디어는 기쁨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는 그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 인생 최대의
고난은 끝난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그저 되도록 빨리 제거하려 들거나, 혹을 아주 수동적으로,
스토아주의적으로 되도록 무감각한 태도로 이것을 참고 견디려 들거나 하는
것은, 아무튼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고뇌를, 씨뿌리는 시기로서
이용해야만 한다. 그리하면 축복의 곡식이 결실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씨뿌리는 시기는 일단 지나가 버리면 그리 쉽게 같은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신의 가장 큰 은총의 하나는, 어떤 커다란 선한 일의 승리가 거의
쟁취되었을 때 비로소 그 일의 주된 어려움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싸움을 시작할 용기를 갖지 못할 것이다.



6월

종교라는 것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6월 1일
신의 신중하고 서둘지 않는 인도는, 스스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운, 가장 불가사의한 경험의 하나이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과 불안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꾸준히 자기가 소유하는
모든 것을 바치고, 특히 이것만은 진정으로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의지까지도 완전히 신에게 의탁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갑자기
새로운 단계가 열린다. 이 단계에 서면, 자기가 과거에 걸어온 길이 분명해지고,
특히 자기가 행복한 길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하나의 새로운 자유가,
게다가 영원히 곁들여 주어졌다는 것이 명백해 진다. 왜냐하면, 신이 인도하는
길에 있어서는 한 번 지나가 버린 것은 재차 되풀이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인간이 스스로 택한 자기 개선의 길과의 큰 차이다. 자기가 택한
길에서는 대체로, 부질없이 뛰어오르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지쳐 버려, 다시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빠져들 뿐이다.

레에타레 (사순절의 네 번째 일요일)

내 마음이여, 네가 사로잡혀 있는
고뇌를 벗어나 일어나라.
네 위에 덮어 씌워져 있던
고통의 날은 이미 끝났다.
오늘 온 세상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아름답다.
너는 이 푸른 언덕 위에서
지금까지도 많은 무거운 짐을 벗었다.
아침 이슬은 풀잎마다
밝은 아침해를 받아 반짝이고,
성모 마리아의 은관이
밝게 개인 창공에 빛난다.
가지마다 새들이 휴식을 취하고,
즐거운 듯 예쁜 날개를 다듬는다.
마지막에 남아 있던 검은 까마귀도
오지로 날아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만 더 참아라.
이젠 가슴을 태우지마라.
봄의 폭풍우가 지나간 뒤에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여름의 기쁨이 찾아오는 법이니.

6월 2일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초감각적인 힘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요지부동한 확신을 내게 안겨 준 것은 언제나 내 의지가 없이, 아니 게다가
왕왕 내 의지에 역행하여 일어났다는 경험이다.

6월 3일
진정으로 신을 믿는 사람들은 원래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며,
때로는 세상과 어울려서도 스스로 이상하게 느끼는 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진정한 신앙은 세상의 보통 신앙과는
다른 것으로서, <산을 옮길(고린도 전서 13:2)>뿐만 아니라, 더 한층 힘든
일로써 인간의 마음이나 사상까지도 옮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신앙은
신을 사랑하는 영혼에 신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없이는 생길 수가 없다.
이 신의 접근은 아주 유례가 없는 기적으로서, 이에 비하면 거기서 생기는
모든 이상한 작용이나 정신력은 그저 당연한 거의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되기조차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일찍이 가능했었다고 하면,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도 다름 아니 이와 같은 구원이다.
창세기 49:18, 마태복음 21:21

6월 4일
요한계시록 3:20에는 성령이 마음의 문밖에 서서 두드릴 때 우리가 그 문을
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소원에 따라서 성령이 보다 나은
생활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 수 있는데도 열지 않는다면 그만큼
또 우리의 책임은 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고자 하지 않는다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눈앞에 현존하여
당장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6월 5일
기독교계는 완전한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약한 사람들의 사회, 자신의
약함을 알고, 신앙의 길을 따라 나아가 바른 생활로 들어가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갖춘 사람들의 사회이다. 동포교회 찬미가 395번

6월 6일
현대의 완전히 도착된 종교교육은, 신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고작
신을 두려워하는 것밖에 가르치지 않는다. 실은 그 이면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그 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유일신을 갖는
행복을, 대체로 인생의 말년에 비로소 아는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에서 약간
비통한 어조로써 말씀하고 있는 탄식 -즉, 이 유일신은 <이전에 이 신 이외의
온갖 신들(때로는 몹시 불순한 신들)이 가지고 있던 성질들을 일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탄식은 오늘날도 역시 완전히 살아 있는 진실이다. 예레미야
30 호세아 2
또 복음서는, 특히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은 모두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써 설교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영이 담기지
않은 설교나 오직 형식적으로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사람들을 진리에 대하여 더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민중을
기독교로부터 등을 돌리게 해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 6:63

6월 7일
우리가 인간의 일을 동정을 가지고 볼 수가 없다면, 세상과의 접촉은 우리의
내적 인간을 반드시 해친다. 이것이 수도원 생활을 정당화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인 정당화를 의미함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그것을 면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실제적인 교훈에 대하여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누구에게서나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일반적인 인생관에 관해서는, 우리는 역시 꾸준히 사색과 경험에
의하여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심화하고 또 순화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으로부터의 영향에도 항상 마음을 연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또 만일 우리가 시대정신 전체와 서로
융화되지 않고 대립한다고 하면, 우리의 인격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에
따를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여간해서 없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까지
<개인이 시대정신에 전과 다른 방향을 부여했다>고 하는 사실도 적지 않은
것이다.

민중이나 노예나 정복자는
어느시대에나 이렇게 고백한다.
<지상의 인간들의 최고의 행복은
오직 인격을 갖는 것이다.>라고
사람은 자기를 잃지 않는다면
어떤 생활을 영위해도 좋다.
자신의 본성에 머문다면
일체를 잃은들 어떠랴. (괴테 서동시집)

세밀한 관찰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 사람이 어찌 위대한 일을 생각해
낼 수가 있으랴. (베이컨)

6월 8일
마태복음 18:6,7,10, 12:36 25:40 17:27, 누가복음 6:45 9:54,55,56 10:5 12:15.29
이것들은 한결같이 일상생활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
이에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와 사귀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신의 나라에 속하는 어떤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신의 나라에 들어가기도 하고,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현대의 영국의 어느 여류 문필가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만남, 모든 이별, 온갖 인사를 할 기회, 온갖 약속의
회합, 이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열려진 기회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의 자식들, 하인, 벗 친지들-이들 각자에 대하여 우리는
매일, 하루종일 경우에 따라서는 이 세상의 최선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최악의
것일 수도 있는 것, 즉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6월 9일
오바댜 1:12 미가 7:7-12 나훔 1:7-12 이런 고대 예언자들의 말은 자기
직업상 이러한 책을
읽을 기회가 없는 일반 사람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대한 진리와 수난기를 위한 진실한 위안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요엘 2:17)>하는 질문은 현재 다시금 많은 나라들의
실리주의 정치에 정면으로 빈번히 들이대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주어지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마치 고대 세계의 여러 대국에 대해서도 역시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고는 안 되었듯이. 그러한 나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직 유태의 작은 민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민족은 온갖 결점과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그 당시 그들이 지은 더할 수 없이 무거운 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에도 불구하고, 역시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다. 마태복음
6월 10일
브룸하르트나 그 밖의 역사적으로 확증되어 있는 기적을 행한 사람들의
<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 오직 <사욕이 없는>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형용사를 덧붙여야 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또 이와 같은 이인(다를 이, 사람 인-입력자주) 들의 무수한
모방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자신에
있어서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거나 때로는 이 이상한 힘이 감퇴하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그것과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는 신앙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이른바 값진 진주로서, 그것을 손에 넣으려면
다른 일체의 것을 버려야 하며, 또 이 사랑은 꾸준히 시험 당하고 쓰여지는
것이므로 언제 어느 때든지 현존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랑은 불과
같이 부단히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여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게다가 절대로 속이거나 할 수도 없다. 신앙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또 남을 설득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오직
진실만이 문제가 된다. 무릇 가식적인 것은 시련의 날을 만나며, 그때 실로
무서운 응보를 받는다. 사랑이라는 이 인류의 성스러운 보배는 그것을 위조하는
날에는 반드시 벌을 받고 말 것이다.
신앙의 열쇠는 원래 사랑이다. 신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는 한 신앙은 어렵다. 그러나 뒤에 일단 이 반감이
완전히 해소되면 그것은 용이해진다. 이 장애를 뛰어넘는 데에 신학 같은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즉 이 반감을 떨쳐
버리는 것밖에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는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도, 그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
정면으로 그것을 비난해도 좋다.

성령 강림제 전야 (사무엘 하 5:24)

<너희는 이미 정결해져 있다.> 이제 하루만 더 참아라.
나의 오래전부터의 신뢰여, 다시 한 번 견디어 내라.
이미 조짐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의 은총은
넘치는 흐름이 되어 네 위에 쏟아질 것이다.
이제 잠시만 더, 오, 마음이여, 낙심해서는 안된다.
뽕나무 속에서 벌써 소곤거림이 들린다.
주여, 이제 말씀을 내려 주소서, <빛이 있어라>고,
그러면 날이 새고, 악몽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6월 11일
히브리서 10:30. 신명기 32:36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고통에 임했을 때, 특히 전 민족의 고난에 즈음하여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위안이다. 왜냐하면, 주의 심판을 받을 때에는 우리는 주의 백성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주는 다른 백성에게 그 그릇된 길을 가는대로
버려두시고, 필경은 그들 자신의 행위의 가차없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파멸케
버려두신다. 또 주는 그 경우에도 그러한 나라들을 때를 놓치지 않고
좀 관대하게 심판하시거나, 혹은 좀 더디나 가혹하게 심판에 맡기시는 일도
있지만, 아무튼 신은 항상 거기에 사는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것은
특별히 확인할 것까지도 없는 일이다. 히브리서 10:35-39

6월 12일
인간의 일생의 역정은 실은 커다란 환상에 불과하다. 그 매끈한 표면 밑에
숨겨진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며, 또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
이 겉 껍질에 갑자기 틈이 생겨, 신이 보시는 대로의 내부의 실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사람의 판단이나, 그리고 전기 등은 겨우 절반밖에
진실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마저도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는 하나 인간적 공정조차도, 19세기 문명의 성과를 일방적으로
찬미한 반동으로서 생긴 저 정치적 염세주의의 영향 아래 그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우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널리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죽고 난 후에 곧 그 사람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평가는,
결코 전설 따위는 아니며, 대체적으로 바른 의견으로서, 설사 즉시 소리 높이
훤 전되지는 않을지라도 언제까지나 길이 존속되는 것이다.
악한 인간이면서도 길이 명성을 유지했다는 예를, 적어도 나는 역사상
단 하나도 생각해낼수가 없다. 그와 반대의 경우쪽이 많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무엇보다도 먼저 선한 인간도 역시 왕왕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중대한 과오를 범하기 쉽다는 것에 입각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역시 그 사람들의
근본적 성질이 선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과오도 특별히 용서받는 것이다. 이른바
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거의 모든 유명한 교사들이
그 좋은 실례이다. 비스마르크나 괴테나 프리드리히 대왕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로써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는 정의를 향한 깊은 요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요구는 참으로 실재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생사를 걸고 신뢰하는 신의 그 정의의 여운이며, 그 작용인 것이다. 잠언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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