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5일 수요일

신촌이미지한의원 추천책 조선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권순형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점차 남녀의 구별이 희미해지고 있다. 속옷 광고나 세탁기
광고나 부드러운 남자 일색이다. 남성용 색조 화장품이 나왔는가 하면 치마를 입은 남자도
등장했다. 간 큰 남자 시리즈는 끝간 데 없는 인기를 구가하며 계속 후속편이 나오고 있다.
'남자는 바깥 사람, 여자는 안 사람'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조선시대에는 왜 그렇게 남녀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을까?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에서는 이것을 '부부유별'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주 만물에 하늘과 땅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이것은 음양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부부는 상호 보완적이되 각자의 일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유별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서,
남자는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이며 여자는 그에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불평등한 남녀관계는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동안 내낸 교육을 통해
주입되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상위에 눕히고 옥을 주어 놀게 하며 여자아이는 바닥에
눕히고 기와를 가지고 놀게 하였다. 이는 꼭 여자를 천대해서가 아니라 분수에 맞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랄 때도 남자아이는 어른의 부름에 빨리 대답하게 하고 여자아이는 느리게
대답하게 하며, 남자아이의 띠는 가죽으로 만들고 여자아이의 띠는 실로 만드는 등
구별하여 키웠다. 교육내용도 완전히 달라 남자는 6살이 되면 숫자를 헤아리는 것과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르치고, 9살에는 삭망육갑 등 날짜를 헤아리는 것을 가르쳤다.
10살이 되면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반면 여자는 10살이 되면 나다니지
않고 여사의 가르침을 유순히 따르며 방적과 양잠을 하고 비단을 짜며 여자의 일을 배워
의복을 장만하고 제사를 보살피는 것을 가르쳤다.
일상 생활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분명하였다. 집의 구조 자체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고 가운데 중문이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문을 넘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부부간에
옷홰나 시렁도 구분하여 섞이지 않게 하였다. 여자는 문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해 촛불을
켜고 밤에만 다녀야 했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길을 걸을 때도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다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의 서로 다른 교육 및 내외법은 양반층의 이야기일 뿐이다. 서민의
경우에는 특별히 교육이랄 것도 없었고 내외법도 지켜지지 않았다. 남자들과 같이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하는 처지에 내외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또 아이도 엄마가 밭에서
일을 할 때 나무등걸에 묶어 놓거나 어린 누나의 등에 업혀 있어야 했으니 유아교육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양반층이건 서민층이건 여성에게는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삼종지도'에 대한 교육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성취가 막혀 있는 한, 여성은 가정 속에서
남성의 보호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는 신분에 상관없이
조선시대 전체 여성의 숙명이었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
조선시대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오늘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사를 잇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혼이었다. 그런데 결혼은 여자가 남자의
집에 가서 사는 것이므로 특히 여성에게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시집의 가부장적 질서에
적응해야 함은 물론 시집의 대를 잇는 것이 여자의 제일 가는 사명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결혼하는 딸에게 시집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생활교육과 함께 성교육이
행해졌다.
생활교육은 주로 말고 행동거지 및 여러 법도에 대한 교육이었다. 시집에서 걸음을 걸을
때는 발가락 끝에서 뒤꿈치까지의 길이보다 더 길게 떼어서는 안되고, 어른 앞에서는
뒷걸음질로 물러 나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제례나 상례 때 곡은 어떻게 시작하고
그치는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눈물이 나오는가 등을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실습시켰다.
성교육은 아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다. 남편의 양기를 해치는 메밀고사리 같은 음식은
삼가야 한다는 것과 아들을 낳을 확률이 높은 날을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즉 월경이 끝날
무렵 깨끗한 무명 조각을 음구에 꽂았다가 떼어 보아 그 색깔이 옅으면 잉태의 적기가
지난 것이고 샛붉으면 아직 적기에 이르지 않았으며 금빛이면 적기로, 나흘 안으로 홀수
날에 씨를 내리면 아들이고 짝수 날에 씨를 내리면 딸이 된다. 또한 이는 간지와도 상관이
있어 봄에는 갑을날에, 여름에는 병정날에, 가을에는 경신날에, 겨울에는
임계날에 씨를 내리면 아들이 되는데 월경 뒤 엿새 안에 이 간지가 든 날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신부수업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손가락 마디로 간지를 짚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여성은 남자보다 낮은 존재로서 그저 아들을 낳는 기계에
불과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처는 남편보다 낮은 존재이나 그렇다고 하여 부부간에
균형을 잃어서는 안되었다. 따라서 부부는 각자의 세계가 인정될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일정 정도의 지위가 주어졌다. 우선 양반층 여성들은 부인봉작제도라 하여 남편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하였다. 봉작은 아들의 공에 따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여성은 가정을 운영하는 중심이었다. 가정 일은 남편이 간섭 할 수 없었고 가정
내에서 부인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가장은 외적인 위엄만 지킬 뿐 가정 경영과 제사준비,
자녀교육 등은 모두 처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서 입양을 결정한다거나
혼인상속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수렴청정도 여성의 이 권리에서 비롯되었다.
끝으로 여성에게는 재산권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제사를 지낼 맏아들을 제외하고는
여러 아들과 딸이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가졌다. 결혼한 딸도 똑같은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혼인 전에 가져온 재산은 결혼 뒤에도 독립적으로 경영하였다.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처의 노비는 일단 남편이 부리지만 남편이 재혼하면 부인의 친정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여성에게 재산상의 높은 지위를 인정해 준 이유는 재혼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뒤 수절을 하려면 경제적인 보장이 있어야 했기에 여성의 재산권은
보호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재산상속에 대한 권리는 점점 낮아졌다. 제사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맏아들이 더욱 중요해졌고, 상속재산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은 양을 상속받게 되었으며, 여자는 남존여비 사상이
보다 강해짐에 따라 이들보다도 더 적게 받게 되었다. 특히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관념이 확실해지면서 상속에서 배제되어 갔다. 반면 정절에 대한 의식은 점점 극단적이
되었다. 이전에는 남편이 죽은 뒤 재혼만 하지 않아도 열녀였는데, 이제는 남편을 따라
죽든지 해야 겨우 열녀 축에 끼일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 여성층 중에서도 열녀가 점점 늘어났다. 이것은 조선 후기 서민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일정 정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보급되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가 그간의 한글 창제 등 집요한 교화사업
끝에 드디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뿌리를 내리게 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유교윤리가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확고해짐에 따라 남존여비, 출가외인 사상은 더욱 강고해지고
여성들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기만 하였던 것이다.


[칠거지악은 빈 말?]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결혼 자체가 남녀의 인위적인 결합인 이상, 결혼이 있는
곳에 이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혼인과 마찬가지로 이혼도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행해졌다. 소위 칠거지악이라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처에게 일곱 가지 잘못이 있을 때 처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으로, 처가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다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다거나, 음란하여 낳은 자식에
대한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할 수 없을 때 행해졌다. 또한 질투가 심하여 처첩제가
운영되기 어렵게 한다거나, 나쁜 병이 있어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없다거나, 말이 많아
대가족제도를 잘 운영할 수 없게 한다거나, 도둑질을 하는 경우도 칠거지악에 들었다.
그런데 이 '칠거'는 사실 적용하기가 매우 애매했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한다 할 때
어느 정도를 불효로 규정하는가, 그리고 병이 있다고 할 때 어느 정도가 이혼사유인가
등이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며느리를 쫓아내려고만 들면 어떤 식으로든지
걸고넘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칠거 조항이었다. 이에 최소한이나마 여성을 보호하려고
둔 것이 '삼불거'였다. 삼불거란 처가 쫓겨나면 돌아갈 곳이 없다거나, 부모의 3년 상을
같이 치렀다거나, 가난할 때 시집와 뒤에 부유하게 되었다거나 할 때는 칠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어도 처를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3불거가 있어도 나쁜 병에 걸렸거나
간통을 했을 때는 예외로 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효도가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시부모에 대한 불효도 구제 받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매일매일 이혼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혼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가 최대한 이혼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절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까지 정절을 지키자니 재혼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고, 재혼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산된다는 것은 곧 사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처를 버리는 것은 부득이할 경우가 아니면 금지되었고, 따라서 칠거 사안
중 음란과 시부모에 대한 불효 외에는 거의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다. 고종 때는 더
나아가 칠거 중 아들을 두지 못하는 것과 질투가 제외되어 '오거'가 되고, 삼불거 외에
자식이 있으면 무조건 이혼할 수 없게 하여 '사불거'가 되었다.
이처럼 이혼이 어려웠던 것은 한편으로는 처의 자리를 보장해 주는 측면이 있어 여성의
입장에서는 좋은 점도 있었다. 그러나 피차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루어진 결혼이 원만할
수 만은 없었다. 남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혼을 하기 위하여 처의 죄를 꾸며댔다. 가장
많은 것이 확실히 이혼을 보장받을 수 있는 '처의 간음' 문제였다. 세종 때 김달이라는
사람은 결혼한 지 3년만에 비첩에게 빠져 자기 처가 결혼 전에 과거가 있었노라며 쫓아
버렸다. 이것은 당연히 무고였고 김달은 처벌받은 뒤 다시 처와 살도록 조치되었다.
또 다른 방법도 있었다. 즉 소박이라 하여 형식적으로는 부부로 생활하지만 실제로는
남남처럼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축첩이 허용되던 당시의 관습을 이용, 마음에 드는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 소박에는 이같은 '외소박'외에 '내소박'이라고 하여 처가 남편을
도외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나 현실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박은 주로
남편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소박은 칠거지악과 달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혼이 어렵다거나, 그래서 소박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거나 하는 것은 주로
양반층이었고, 서민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이혼이 쉬웠다. 사정파의 또는 할급휴서라는
방법이 있었다. 사정파의란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부가 서로 마주앉아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의 말을 하여 서로 응낙한 뒤에 이혼하는 것이다.
할급휴서는 이혼문건 같은 것으로서 칼로 웃옷의 자락을 베어 그 조각을 상대방에게 주어
이혼의 표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민의 경우로 사대부가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


[이혼, 소박 그리고 그 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그저 버림받는 대상일 뿐, 스스로 이혼을 요구할 수는
없었을까? 조선시대에 처가 이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남편이 의절을 범했을 때와 남편이
집을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3년 이상 계속될 때였다. 남편이 의절을
범했다는 것은 처의 조부모부모를 때리거나 처의
외조부모백숙부모형제고모자매를 죽였거나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를 말한다. 이
때는 관청에 신고하고 이혼을 청구할 수 있었다. 또 남편에게 매를 맞았을 때도 이혼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차별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과 같은 일들은 매우 특수하여 일상에서는 거의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에
여성들은 남편을 협박하여 강제로 이혼장을 받아 낸다거나 남편을 피하여 도망쳤다.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다. 특히 남편 몰래 달아나는 것은 곤장 1백대, 달아나
재혼까지 했으면 교수형 감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이혼의 권리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이혼이 허락된다 해도 여성들은 선뜻 이혼할 수 없었다. 재혼이
불가능했고, 사회경제적 활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해도 설자리가 없었던
여성들은 대부분 그저 이혼이나 소박을 당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인내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 여성들은-대부분 이혼을 당한 것이지만-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자식은 부계에 속하니 남편 측에 빼앗겼을 것이다. 조선 초까지는 재가가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혼을 하더라도 남편이 재혼한 뒤에 해야
했다. 태종 때 손흥종의 딸 손씨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남편이 새장가를 들기도 전에
결혼했다 하여 부도에 어긋났다는 죄명으로 뒤의 남편과 함께 곤장 1백대를 맞았다. 성종
이후에는 재가금지로 그나마 이러한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영화로도 소개된 바 있는
어우동은 시집에서 쫓겨난 뒤 스스로 창기라 자처하며 성적인 자유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는 결국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끝에 교수형에 처해지고야 말았다.
소박 당한 여자의 삶도 답답하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나마 시집이 상류층이면 안살림을
도맡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고 남편이 첩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해도 첩과
다른 집에서 기거할 터이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소박 당하는 한, 같은 집에서 첩과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친정으로 돌아와
평생 소박데기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니면 성황당 길에
나아가 주어지는 운명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습첩이라는 풍속이 있었다. 소박 당한 여자가 새벽에 성황당 길에 서
있으면 그녀를 처음 발견한 남성이 그녀를 거두어 살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기혼이건 미혼이건, 나그네건 거지건 여자에게는 따질 권리가 없었다. 그가 누구이든 처음
만나는 남자를 따라가 그와 운명을 같이 해야만 하였다. 노총각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배필로 주워 가는 예가 제일 많았지만 재수가 좋을 때는 낙향하는 귀인이나 어사를 만나
귀첩으로 팔자를 고치는 경우도 없잖아 있었다.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 이것이 조선시대의 여인의 삶이었던 것이다.(이화여대 강사)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정진영

[족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오늘날 웬만한 집에는 족보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이것은 무한한
과거로의 역사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시조는 누구이고, 그 할아버지의 아들, 또 그
손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일을 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족보를 보면 우리 모두는 신라 왕실이나 아니면 고려시대
유명한 인물의 후손임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중국인을 시조로 둔 가문도 적지 않다.
그뿐 아니다. 역사책에서 자주 대면할 수 있었던 인물도 가끔은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부귀영화를 누렸음직한 조상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에 우쭐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 같은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족보에 수록된 내용은 모두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수천에 불과한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산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만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귀족보다도 농민이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의 후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자면 한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족보를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족보를 믿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족보상의 시조와 나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 어찌 그럴 수가


[족보는 언제, 왜 만들어졌나]
족보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지만, 고려시대에도 '씨족', '세계도', '가첩'
또는 '족도' 등 고문서 형태의 족보들이 있었다. 종실귀족공신고급관원의
내외자손들은 문음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와 신분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족보다운 족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족보는 사가보다 왕실에서 먼저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즉 태종 연간의 <선원록>,
<종친록>, 세종 때의 <당대선원록>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는
<안동권씨성화보>(1476년)가 인쇄 반포된 이후 16, 17세기를 거치면서 족보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많은 처첩과 이들의 자녀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은 특권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주 충돌하기도 하였다.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등극한 태종으로서는
왕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이 왕실에서 족보를
편찬한 이유였다. 족보는 누가 처이고 누가 첩인지, 누가 적손이고 누가 서손인지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양반 사대부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양반사대부가의 조상 숭배는
정치사회적인 이해관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양반들은 족보를 통해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의 차별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양반임을 의미했다. 알고 있듯이 양반은
사회적인 여러 특권을 누렸고, 상민과 천민들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과 천민들은 누구나 양반이 되고자 하였다. 이들이 양반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족보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족보는 조선 후기에
더욱 광범하게 보급되어 나갔다.


[족보에는 딸의 이름이 없다]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흔히
세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또 수록되는 범위가 전체냐, 한 분파냐에 따라 대동보와 파보로
구분한다. 특정인의 가계를 중심으로 작성된 가첩가승가보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족보에는 시조에서부터 세대순으로 이름과 자, 시호, 과거와 관직, 저술과 문집,
특기할 만한 업적, 그리고 출생과 사망 연월일, 묘지의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기재된다. 이뿐만 아니라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족보는 철저히 남자 중심의 기록물이다. 조선시대의 여자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따라서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는 없었다.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올려지고,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성관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다. 물론 이 같은 기록은 족보와
개개인에 따라 상세하고 소략함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족보는 30-40년 또는 50-60년마다,
또는 백여 년 뒤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새로 편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 성씨의
족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17세기를 전후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족보는 기재되는 내용과 체제상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회는 아직 고려 적인 전통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유교의 종법적인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 남자가 신부집으로 장가를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곧
처가살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딸은 차별되지 않았으며,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아니어서
후손이 없어 세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동성동본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의
하나가 족보상에서 아들과 딸, 친손외손이 동일하게 수록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손과
마찬가지로 외손의 외손, 또 그 외손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기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족보에는 특정 성씨만이 등재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성씨가 망라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성화보>는 안동권씨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총 수록 인원 9,120명 중
867명에 불과했고, 외손의 외손으로 이어지는 가계가 6, 7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성화보>는 서기정 등 권씨 외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같이 조선 전기의
족보는 기재내용과 편찬과정상에서 조선 후기 또는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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