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강한 사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 년 7월 말,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 14
호 감방 사람들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떨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도망을 치면 같은 감방에 있는 다른 사람 스무 명을 아사형에
처한다"는 수용 소장 프리치의 경고를 떠올리고 그들은 다들 죽음과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구 하나 잠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잔혹한 고문에 살아남기를
원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들이었지만 아무도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감방으로 끌려가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숨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창자와 핏줄이 말라붙어
짐승처럼 날 뛰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영웅들마저도 "내가
뽑히면 어떡하나."하고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아사감방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밤마다 맹수의 부르짖음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굶주림의
고통보다 목마름의 고통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사형에 처해진 사람들한테서는
인간다운 점을 찾아볼 수가 없어 나치스의 간부들마저도 그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점호 시간. 수용 소장 프리치는 도망간 사람을 찾지 못하자 14 호 감방
사람 전원을 수용소 마당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기절해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열
밖으로 끌어내어 던졌다. 내던져진 사람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이 쓰러져 포개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무더기는 점점 커졌다.
오후 3시. 그들에게 30분간의 휴식과 수프를 먹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 여전히
차려 자세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이윽고 저녁 점호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친
포로들이 수용소 마당에 정렬하자 소장 프리치는 교활한 조련사처럼 각 감방별로
보고를 받으면서 이리저리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14 호 감방수들 앞에
딱 멈추어 서서 갑자기 발작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도망친 놈이 아직도 안 잡혔다. 이제 너희들 중 열 명이 저 아사감방에 가서
죽어야 한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스무 명을 한꺼번에 보내겠다."
소장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투른 폴란드어로 계속
지껄였다.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이빨을 보여!"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들처럼 벌벌 떨었다. 소장은 그들의 이빨을 자세히
관찰하는 척하면서 그들 사이를 저승 사자처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보좌관 팔리치가 즉시 지적된 수형자의 번호를 명부에 기입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한 개 번호에 불과했다. 지적을 당한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몇 차례 버둥거리는 듯하더니 열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서 포로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너, 너, 너, 너, 그리고 너!"
한 순간에 열 명이 지적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불쌍한 내 마누라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지적을 당한 사람 중 한 사내가 열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울부짖었다. 지적 당하지
않고 열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아사감방에 가는 일만은 면하게 되었다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신발을 벗어!"
보좌관이 명령을 내렸다. 사형수들은 맨발로 형장으로 가게 돼 있었으므로 그들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던졌다. 부인과 아이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다고 울부짖던
사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좌로 돌앗!"
보좌관이 아사감방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좌로 돌았다. 그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포로 한 사람이 동료들 사이를 헤치고 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가 약간 옆으로 굽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고 맑은
눈으로 소장 프리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걸어나왔다.
"정지! 무슨 일이야? 이 폴란드 돼지 새끼야!"
당황한 소장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소장 앞에 똑바로 섰다. 아주 침착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띤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옆 사람한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 사형수 중의 한 사람을 대신해서 제가 죽겠습니다."
"뭐라구?"
소장은 멍하니 놀란 얼굴이었다. 그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바꾸어 본 적이 없는, 반항하는 자는 단 한 발의 총성으로 간단히 처치해 벌이던
소장이 갑자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래?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먼저 처치해 버린다'는 나치스의 불문율을
먼저 내세웠다. 혹시 자신의 태도가 소장에게 영웅적으로 비쳐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몹시 조심하는 태도였다.
"그래, 누굴 대신해서 죽겠다는 거냐?"
"저 사람, 부인과 아이들을 가진 사람 대신입니다."
그는 아까 한없이 울부짖던 프란시스코 가죠프니체크 중사를 가리켰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의 신부입니다."
그의 대답은 짤막하고 엄숙했다. 소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없이
젊고 화사해 보였다. 그는 소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멀리 지평선에 걸려 있는 붉은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침묵이 흘렀다. 점호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쉰 목소리로 소장 프리치가 말했다.
"좋다! 함께 가라!"
소장은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좌관 팔리치가 아사감방행
명단 가운데 번호 하나를 지우고 대신 '16670'번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갓!"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바람으로 아사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 사람도 마치
양 떼를 모는 목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이다.
어머니의 마음
깊은 숲 속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었고, 그 호수에 큰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호수에 외로운 청년 한 사람이 와서 쓸쓸하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뱀은
그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만약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청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호숫가에 자주 찾아왔다. 늘 골똘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호숫가를 거닐다가 돌아갔다. 뱀은 갈수록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하면 청년의 아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을 새웠다. 하루는 뱀이
호수를 지키는 신을 찾아갔다.
"저는 저 외로운 청년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은 뱀을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이제 저 청년을 따라가서 그의 아내가 되어라. 그러나 네가 아기를 낳으면 다시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와야 한다."
뱀은 청년과 깊은 사람을 나누었다. 꿈 같은 세월이 흘러 지나갔다. 뱀은 마침내
아기를 낳게 되었다. 이제 다시 본디의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뱀은 눈물을 흘리며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다 고백했다.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운 한쪽
눈을 뽑아 아기의 장난감으로 남기고 다시 호수로 돌아갔다. 청년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열심히 아기를 보살폈다. 아기의 손엔 늘 어머니의 눈을 쥐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알을 가지고 놀면 아기가 탈없이 잘 자랐다.
그런데 한번은 아기가 그 소중한 어머니의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호숫가로 가 뱀을 불렀다. 그러자
뱀이 나타나 나머지 하나 남은 눈알을 마저 뽑아 주면서 말했다.
"저는 이제 앞 못보는 장님입니다. 부디 잃어버리지 마시고 소중히 간직하세요.
녹지 않는 눈사람
꽃샘바람이 부는 이른 봄날 아침, 하늘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함박눈이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흰눈들을 불러 모았다. 첫눈, 봄눈, 싸락눈, 풋눈, 밤눈, 가랑눈,
진눈깨비 등 하늘나라에 사는 눈이란 눈은 모두 함박눈한테 모여들었다.
"자 다들 이리로 가까이 오시오."
함박눈이 허옇게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황급히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올 겨울에
우리들이 다들 바빠 땅의 나라에 내려가지 못한 탓으로,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 난리가 났소. 몇십 년만의 겨울 가뭄이라고 하면서 땅의 나라 사람들이 목말라
야단들이오. 이걸 어떡하면 좋을지 다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한번 말들 해 보시오."
함박눈이 다시 헛기침을 한번하고 말을 마치자 흰눈들은 일단 안심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무슨 큰 변고하고 난 줄 알고 속으로 무척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땅의 나라를 잊고 지낸 것이 잘못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들 땅의
나라로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해마다 가장 먼저 땅에 다녀오는 일을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첫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했다.
"올해 들어 땅의 나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눈들도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싸락눈이 온몸을 서걱거리면서 첫눈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흰눈들은 모두 지금 당장이라도 땅의 나라로 내려가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함박눈은 흰 수염을 다시 한번 쓰윽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무척 심하다.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눈들은 지금
당장 땅의 나라로 내려가도록 하라."
이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한 눈은 봄눈 형제였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그들 형제는
아직 단 한번도 땅의 나라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땅의
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봄눈 형제는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땅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형, 난 지금 기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와. 땅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나라보다 더 넓을까?"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보다는 더 작겠지."
봄눈 형제는 서둘러 도착한 곳은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나라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철조망으로
둘러 처져 있었다.
"형 저게 뭐야? 왜 남북으로 저렇게 갈라져 있을까?"
봄눈 형제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던 봄눈 형제를 갈라놓았다.
"어, 어, 형! 혀엉!"
형의 손을 놓쳐 버린 동생이 바람을 타고 내려앉은 곳은 철조망 위쪽 땅인 북한
땅이었다. 동생의 손을 놓쳐 버린 형이 내린 곳은 철조망 아래쪽 땅인 남한 땅이었다.
봄눈 형제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휴전선이 그어진 남북으로 그만 서로 헤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내렸다고 좋아서 다들 야단들이었다. 몇 십년
만의 겨울 가뭄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더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남한 사람들이나 북한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동생 봄눈은 휴전선 너머 남녘 땅에 내린 형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형 봄눈도 휴전선 너머 북녘 땅에 내린 동생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봄눈 형제들이 서로의 소식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형이 보고 싶어 울다가 잠이 든 동생은 누가 자꾸
툭툭 몸을 건드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남녘 땅에 있는 형도 밤새워 동생을 생각하다가 잠이 든 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애들아, 왜 이래? 왜들 이러는 거야?"
"가만 있어. 우리가 널 눈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눈사람이 되면 형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눈사람이 되면 동생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봄눈 형제는 남한과 북한의 어린이들에 의해 커다란 눈덩이로 변해 갔다. 그리고 곧
눈사람이 되어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형은 북쪽을, 동생은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진달래가 피고 산과 들에 봄볕이 완연해도 그들은 그대로 녹지 않고 서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동방박사
우리는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가 세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멜키온, 발드사살, 개스터라는 세 사람 외에도
알타반이라는 점성술가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어느 날, 알타반은 하늘의 별을 보다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았다. 그는
즉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아기 예수에게 드릴 선물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귀한 보물 세 가지를 사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길을 떠났다. 미리 다른 동방박사
세 사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그는
강도를 만나 겨우 목숨만 건진 한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는 강도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기로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있었다.
알타반은 사내를 들쳐업고 가까운 여관으로 가서 주인을 찾았다.
"이 사람은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제 대신 이 사람을 좀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알타반은 여관 주인에게 사내를 부탁하면서 그 대가로 사파이어를 내놓았다. 그러자
강도를 만나 사내가 알타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그리 급히 가시는
길입니까?"
"메시아가 탄생한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사내는 유태인으로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알타반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면서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알타반은 동방박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부지런히 낙타를 몰았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다른
동방박사들은 이미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떠난 뒤였다. 알타반은 하는 수없이 혼자
베들레헴을 찾았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한 신비스러운 아기가
얼마 전에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자
천사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렀으며,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에게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으며, 부모들이 어디론가 아기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등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알타반은 베들레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가 묵은 집은 어린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사는 한 가난한 과부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한 이웃집 여자가
찾아와 울부짖었다.
"헤롯의 군인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지금 헤롯은 읍내에 있는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고 있어요."
알타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과부에게 꼼짝 말고 집안에
있으라고 말하고 문 밖으로 나가 빗장을 질렀다. 그리고 칼을 빼든 군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루비를 내밀며 말했다.
"이 집에 손을 대지 않으면 이 루비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집의 주인입니다. 내게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디 그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보석이 탐난 군인을 루비를 받고 그대로 돌아갔다. 알타반은 아기 예수에게 드릴
보물을 벌써 두 개나 다른데 써 버렸다는 사실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아직 보물이
하나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으며 다시 메시아를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알타반은 그때까지도 아직 만나고 싶은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알타반은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분이 예루살렘에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알타반은 황급히 그곳의 향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에는 그분이
자신을 유대의 왕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알타반은 급히 발길을 골고다로
돌렸다. 일찍이 그분의 별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알타반은 보석을 넣어 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이제는 단 하나의 보석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보석을 형리에게 주면 어쩌면 그분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타반이 급히 노예 시장 앞을
지나갈 때였다. 그곳에 한 노예 소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
"저를 구해 주세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게 순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수치와 죄악에 가득 찬 삶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좀 구해 주세요."
알타반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보물은 이제
그분을 위해 쓰고 싶었으나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타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당신을 위해 남겨 두었던 마지막 보물은
이제 이 소녀를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알타반은 마지막 하나 남은 보석 에메랄드를 노예 상에게 주고 소녀를 구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온 천지가 캄캄해지고 비바람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알타반은
얼른 가까이 보이는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 집은 곧 알타반을 덮치면서
무너져 내렸다. 알타반은 그 집에 깔려 죽어 가면서 말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 주어 버리고, 정작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6^3456,12,15^
1951 년 5월 17일.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대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사상
국군이 최대로 괴멸되는 순간이었다. 장병들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걸어 후퇴의
행군을 계속했다. 적의 포격이 비오는 듯했고, 도처에 매복 공격이 있었다. 대열에서
이탈된 낙오자들은 포로가 되거나 총 맞아 죽거나 동사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몇 날
며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산 준령을 넘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이미 지휘
계통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병사들은 모두 자기 체력만 믿고 달아났다. 개중에는 낮엔
중공군 포로가 되었다가 야간에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도 있었다. 참모장
숙소를 돌보고 있던 한 아주머니도 후퇴하는 참모장 일행을 따라 급히 들에 아기를
들쳐업고 후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 가슴팍까지 물에 잠기는 깊은
계곡을 건널 때였다. 갑자기 적의 총격이 계곡의 향해 집중되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앞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계곡을 건너뛰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참 정신없이 뛰다 보니 앞에 그 아주머니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들에 아기는 없고 빈 포대기만 업혀 있었다.
"아주머니, 아기는 어떻게 했어요?"
한 병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제서야 아주머니는 혼절하듯 다시 계곡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이미 계곡으로 떠내려간 아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북의 어머니
그는 43 년만에 고향땅 북한을 찾았다. 재미 교포로서의 공식 일정을 모두 끝내고
곧장 고행 마을을 찾아 나섰다. 길도 옛길도 아니고 마을 이름도 옛 이름이
아니었으나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한 집을 찾아내었다.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것 말고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자리와 뒷간과 광이 있던
자리까지 예전과 똑같았다. 심지어 뒤꼍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까지
그대로였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봉당에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꼬부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할머니, 혹시 43 년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을 아세요?"
그는 가만히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노파는 꿈이라도 꾸는지 눈도 뜨지 않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50 년 전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네? 50 년 전부터요?"
놀란 그는 주름 투성이인 노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노파는 이빨이 몽땅 빠지고, 하얗게 센 머리가 북데기처럼 엉켜
있었으며, 눈마저 짓물러 눈곱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헛일 삼아 다시 물어
보았다.
"그러면 할머니, 6^3456,12,15^ 나기 전에 이 집에 살던 기영이라고 아세요?"
"기영이?"
노파의 얼굴에 환히 반가운 기운이 스치더니 이내 눈물이 고였다.
"우리 아들인데 죽었어."
"아니 그러면 저의 어머니세요? 어머니, 제가 기영인데요."
"뭐라구?"
노파는 귀가 어두워 잘못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남에 갔는데 죽었어. 한번만이라도 만나 봤으면 좋겠어."
"어머니, 제가 이남에 갔던 기영이에요. 고개를 들어보세요."
그제서야 노파가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에
불꽃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로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겨 내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젊은이 못지 않은 힘으로 와이셔츠마저 벗겨 내었다. 그리고는
"아이고, 기영아!"하고 그의 등에 얼굴을 대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꿈인가 생시가? 네가 정말 기영이구나! 등에 삼태성이 있는 걸 보니
틀림없는 기영이구나! 아이구,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낳았을 때 이 삼태성을 보고, 우리
집에 인물 났다고 네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셨다."
노파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도 "어머니!"하고
노파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꿈에 그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달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더욱 쏟아졌다.
"휴전선이 막히자 아버지는 네 생각에 화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네 누나와
동생은 6^3466,12,15^ 때 죽었고. 나도 오래 전부터 몸이 아파 널 한번만 보고 죽게 해
달라고 매일 매일 신령님께 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정말 이렇게 보게
되다니. 어제는 오랜만에 네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니 네 얼굴이 통 안 떠올라
아까부터 봉당에 앉아 네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집이 달라지면 네가 영영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허물지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정말 잘 한 일이구나."
노파는 연신 꿈만 같다면서 몇 번씩이나 자기의 손등을 꼬집어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저런 사정상 어머니와 하룻밤도 지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매달리며 우는 어머니에게 몇 달 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그 뒤, 그가 다른 나라에 들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가만히 날짜를 따져 보니 자기가 찾아갔던 바로 그 다음날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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