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 사상:지정행의 요법(REBT)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에픽테투스(Epictetus), A.D. 1세기
REBT(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는 미국의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박사에 의하여 창안된 독특한 정신치료의 이론이다. REBT는 "합리적, 정서적,
행동적 요법"이라는 뜻이므로 "합리적 정서행동치료"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적응문제가 합리적 사고방식의 유무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고 보는 그의
사상은 개인의 이성적인 생각 내지 인지적이고 지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자는 그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곧 지적인 사고과정이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여서, REBT를 지정행의 요법이라고 번역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그의 이론은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고, 뉴욕에 있는 그의 연구소와 방대한 그의 저서를 통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정신분석적 접근에서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나 경험이 현재의
갈등과 고민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치료에서는 내담자로 하여금 잊혀졌던
과거 이야기를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인본주의적인 접근에서도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얽혀 있는 처리되지 않은 내담자의 감정을 상담자가 들어주는 데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엘리스에 의하면 어떤 사건이 내담자의 정서적 혼란이나 고민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내담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가 내담자의 감정을
좌우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어느 젊은이가 입학시험에 두세 번 실패한 후에 말할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하자. 이때에 흔히들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을 가져오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엘리스가 주장한 지정행의 요법에서는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의
원인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으니 이제 나는 끝장이다. 나는
불효자식이고, 사람들 보기에도 정말 수치스럽다. 내 인생은 이제 절망이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다!"라고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험에 떨어진 상황을 놓고서 모든 사람이 다 이 젊은이처럼
우울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져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 다른 사람들도 여러 번 떨어지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부모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좀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
보답해 드리자"와 같이 대응할 수도 있다. 몇몇 사람은 이처럼 심각한 실의와
자포자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을 비관하며 소일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쉽사리 상심을 떨쳐 버리고 재기하여 건전한 삶의 자세를 되찾을 수
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는가? 엘리스에 의하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인 사람들은 시험에 실패한
경험을 대단히 불편한 사건으로 지각하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서글프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하나,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이어서 견딜 수 없다"고
까지 자학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REBT의 사상을 엘리스는 ABCDE의 원리로 간단히
도식화하고 있다.
A(Activating Event, 선행사건) 가령 시험에 떨어졌다든지, 실직하게 되었다든지,
반대하는 결혼을 기어이 고집하는 자녀와 크게 싸웠다든지, 여러 사람 앞에서 직장의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든지와 같이 인간의 정서를 유발하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
또는 행위를 의미한다.
B(Belief System, 신념체제) 어떤 사건이나 행위 등과 같은 환경적 자극에 대해서
각 개인이 갖게 되는 태도로서, 이것은 그의 신념체제 또는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경증 내지는 부적응적 반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합리적인 신념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여기서 비합리적인 신념체제란 위와
같은 사건이나 행위를 아주 수치스럽고 끔찍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하여 자기를
징벌하고 자포자기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C(Consequence, 결과) 선행사건에 접했을 때 다분히 비합리적인태도 내지
사고방식으로 그 사건을 해석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정서적 결과를 말한다.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지나친 불안, 원망, 비관, 죄책감 등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고, 소위 '신경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신체화 질환을 앓게 되기
쉬우며, 늘 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D(Dispute, 논박)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사고 또는 상념에
대해서 도전해 보고 과연 그 사상이 사리에 맞고 합리적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치료자는 논박을 시도한다.
E(Effect, 효과) 비합리적인 신념을 철저하게 논박함으로써 합리적인 신념을 갖게 된
다음에 느끼게 되는 자기수용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감정의 결과를 지칭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A(선행사건) 연속하여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 B(비합리적 신념체제)"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지다니 나는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 나는 견딜 수
없다" -> C(결과)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경향성
B(비합리적 신념체제)"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지다니 나는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 나는 견딜 수 없다" -> D(반박) "내가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무가치한 인간인가?"
"계속 시험에 떨어진 사실이 반드시 참을 수 없는 것인가?"
"계속하여 시험에 떨어진 것이 실망스럽고 몹시 섭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한 인간이고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을 그런대로
견디고 극복해 낼 수 있다" -> E(효과) 의기소침, 섭섭함의 수준에 머무름.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다.
도표 1:A--=B--=C
도표 2:A--=B--=D--=E
@ff
1. 우리는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가?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비정하여 우리가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날마다 겪게 되는 이 "끔찍함" 앞에서 매번 화를 내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생후 최초의 몇 시간 동안에 분노와 비슷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시대이건, 어떤 세기를 막론하고 인류는 거의 매일 자신과 많은 주변
사람들의 분노와 마주치게 된다. 오늘날 심리학자의 대다수 권위자들은,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이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분노감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만약 당신이 경계 상태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당신의 수동성이나 착한 성품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려 할뿐, 당신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심리학자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수동적이거나 침묵을 지키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의 목표 성취를 방해하도록 허용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분노에 대처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 방안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분노를 느끼되 그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고, 부인하고, 억압하라.
--분노를 느끼고 그 감정을 자유스럽게 표현하라.
화를 내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으며,
표현되지 않은 분노는 오히려 분노를 솔직하고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해롭다. 수압의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노와 같은 감정은 끓고 있는 주전자 속의
수증기처럼 압력을 받으면 더 강력해지고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당신이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기만 하고 자유롭게 발산시켜 주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해를 입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위암이나 고혈압 등의 신체적인 질병이나, 여타의
심각한 정신신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당신 속에 가두어 놓기만 하면, 그 분노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당신의 감정은 더욱
악화된다. 그것은 당신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내장이나 창자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제는 당신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자신에게서마저 혹심하게 비판받을 우려가 있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느끼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표현한다면,
위의 경우와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며, 아마도 당신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거나, 한층 더 심한 적대감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할 수도 있다.
몇몇 심리치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여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소위 창조적 공격성(혹은 건설적 분노)의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당신의 분노를 약간 통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표현과는 다르다.
다음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 가면서, 분노를 다루는 여러 이론과 REBT의
해결책을 비교해 보겠다. 만약 당신이 내가 제시하는 원리들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분노나 다른 감정에 관련된 문제들을 REBT의 지침들을
사용하여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하리라고 확신한다.
가령, 내가 절친한 친구인 당신에게 "너의 아파트에 룸메이트로 같이 지낼 용의가
있고, 집세도 함께 부담하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자. 나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당신은 계약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집을 수리하느라고 상당한 수고와
개인적인 경비를 지출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와서 내가 당신에게 "내 계획이 변경되어
지난번에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나에게 매우 화가 치밀
것이다. 당신은 상당한 경비를 지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 와서 다시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해야 하는 큰 불편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화가 나는 감정을 혼자서 삭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까 나에 대한 원망이 마음 속에 쌓여 우리의 우정은 크게
금이 가게 된다. 갑자기 집의 문제가 복잡하게 되어가면서 당신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당신의 다른 활동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당신은 참는 방법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화가 난 감정을 나에게 솔직하게 표현해 버리자고 마음먹는다.
"이봐,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나? 처음부터 자네가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말했더라면 내가 이 따위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자네, 나한테 아주
형편없이 행동하는구먼. 어떻게 친구인 나에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전에 자네에게
이처럼 치사하게 군 적이 있던가? 자네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대한다면
도대체 어떤 친구와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겠나?"
혹은 당신이 소위 창조적 공격성을 발휘하여,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들일 능력과
마음상태를 고려한 다음에 분노의 감정을 토로할 수도 있다. 즉, 당신의 감정을
이야기해도 되겠는지에 대하여 먼저 양해를 구한 다음에 당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하여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되면 득보다는 손실이 더 많다. 결과적으로, 그 상황에서 공격성의 표현은
당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비록 창조적 공격성의
방식이 조금 더 부드러운 방법이긴 하지만, 두 방법은 모두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와 같은 초점으로는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의 "몰지각한" 행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당신은 나의 자기방어를 부추기는
셈이 된다. 만일 당신이 나의 몰지각한 행동에 대하여 나 스스로 비판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했더라면,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비호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할 수 있게 되어 참된 성장의 단계로 나아가서, 나의 행동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강한 자기비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당신이 남의 성격에서 잘못된 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아 지적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더 깊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당신의 비판적인 발언이
아무리 훌륭하고 창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죄의식이나 자기비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며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의 표현을 장려하는 두 가지
접근법에 이러한 문제점이 모두 다 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지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참신한 방법은 없는가?
앞에서 우리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도
역시 역반응적인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간 창조적
공격성의 방식도 약간 더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내민다는 기독교적 용서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 공격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세상에서 그것은 너무나 비실용적인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허울좋은 무골호인의
당신을 더 이용하려 할 것이다. 당신의 양보적인 행동이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똑같이 양보적으로 대해 주거나 존경해 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분노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찰해 보았다. 각
접근법들이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할 경우도 있으나, 모든 상황에서
분노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며,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곤란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다른 사람의
분노나 적대감을 부추기지 않고, 또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통합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색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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