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5일 수요일

신촌이미지한의원 추천책 루소 사회계약론

제 1 편

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법률을 있을 수 있는 형태로 파악할 경우에, 사회질서 속에
어떤 정당하고도 확고한 정치의 원칙이 있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자 한다. 나는 이 연구에서
정의와 이익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법률이 인정하는 바와 이익이 규정하는 바를
향상 결합시키도록 노력할 생각이다.(1)
나는 내 주제의 중요성을 증명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가 정치에 대하여
논한다고 해서, 나더러 군주인가 아니면 입법자인가 하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며, 아울러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하여 논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만약 내가 군주나 입법자라면 당연히 실행해야 할 일을 말로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실행해 버리거나 아니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국가(2)의 시민으로 태어나 주권자의 일원인 나의 발언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정치를 연구할 의무가
충분히 지워져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러 정부를 연구할 때마다, 내가 내 나라의
정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들을 그 연구 과정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제 1 편의 주제(3)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4)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사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심한
노예상태에 놓여 있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변화가 생겼는가?(5) 나는 알 수 없다.
무엇이 그것을 정당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가?(6)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폭력과 그로부터 생기는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즉 "어떤
인민이 복종을 강요당하여 복종하고 있는 한, 그것은 좋다. 그 인민이 구속을 벗어날 수 있고 그
구속을 벗어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민은 그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간 것과 똑같은 권리에 의하여 자유를 되찾는 것이 정당하거나 아니면
인민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간 것이 원래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사회질서는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다.(7) 따라서 이 약속이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방금 주장한 바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초의 사회에 대하여

모든 사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자연적인 것은 가족이라는 사회이다. 게다가
가족에서조차 자식들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필요고 하는 동안만 아버지와
결합되어 있다. 이 필요성이 없어지면 자연적 유대는 곧 끊어지고 만다.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 의무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독립하게 된다. 만약 이들이 계속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합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쌍방에 공통된 이 자유는 인간 본성의 결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가는
법칙은 자기보존에 유의하는 것이고, 그 제일의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만이 자기보존에 적합한 수단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말하자면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인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또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고 있는 것도 오직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가족과 국가의
차이는, 가족에 있어서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지만,
국가에 있어서는 지배자가 인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의 희열 때문에 인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로티우스(8)는 인간의 모든 권력이 피지배자를 위하여 확보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노예제도를 그 예로 들었다.1 그가 계속 사용한 추리방법은 항상 사실에 따라 권리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9) 우리는 이보다 더 논리적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폭들에게 가장
유리하게 되어 버린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전인류가 백 명 정도의 인간에게 예속되어 잇는 것인지 아니면 백 명
정도의 인간이 전인류에게 예속되어 있는지가 의심스럽게 된다. 그의 저작을 통해서 본다면
첫번째 견해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또한 홉즈(10)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류는 많은 가축의 무리로 나누어지고 각 무리마다 주인이 있으며 그 주인은
자기 무리를 잡아먹기 위해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된다.
목자가 자기의 가축들보다 우월한 본성을 타고났듯이, 인간의 목자인 군주들도 그들의
인민들보다 우월한 본성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필론(11)의 보고에 따르면 로마 황제 칼리굴라도
이와 같이 추론하고 이 이론에 따라 왕은 신이라든지 아니면 인민이 짐승이라는 교묘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칼리굴라 황제의 이러한 추론은 홉즈와 그로티우스의 추론과 일치하고 있다. 이들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12)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
위하여 또 어떤 사람들은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한 바 있다.(13)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인간이 노예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만큼 확실한 말은 없다.
노예들은 그들의 구속 안에서 모든 것, 심지어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노예들은, 율리시즈의 친구들이 그들의 짐승과 같은 상태를 좋아했던
것처럼,2 자기들의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태어날 때부터의 노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이미 본성에 반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이 최초의 노예들을 만들어 내었고, 노예들의 비겁성이 그들의 노예상태를 영원히
유지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담 왕이나 노아 황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바 없다. 노아 황제는 세 사람의
위대한 군주의 아버지였으며, 이 세 군주가 사투르누스의 자식들처럼 세계를 분할했으므로
양자를 동일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이 점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은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만하다고 믿는다. 나도 이들 군주의 직계 아니면 그 집안의 종손이 될지도
모르므로, 자격 심사를 한다면 내가 인류의 정당한 왕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14) 어쨌든
아담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이었던 동안만은, 로빈슨 크루소가 그의 섬의 주권자였듯이, 그가
세계의 주권자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제국의 장점은, 왕좌에 안전하게 앉은
군주가 반란, 전쟁, 음모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가장 강한 자의 권리에 대하여

아무리 강한 자라 하더라도, 자기의 힘을 권리로 바꾸고 자기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고서 항상 지배자가 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한 법이다. 여기서 가장 강한 자의 권리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 권리는 겉으로는 아이러니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강한 자의 권리라는 이 말을 설명할 수 없을까? 폭력이란
한낱 물리적인 힘이다. 이 물리적인 힘이 어떻게 하여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폭력에 굴복하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이지, 자의에 따른 행위는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신중을 꾀한 행위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의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이른바 가장 강한 자의 권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할 경우에 생겨나는 결과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넌센스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약 힘이 권리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면, 원인이 달라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것이니, 최초의 힘보다 더 센 힘은 최초의 힘에서
생긴 권리까지도 차지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벌을 받지 않고도 힘에 대하여 불복종할 수
있다면 그 불복종 역시 정당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가장 강한 자는 항상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강한 자가 되도록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힘이 없어질 때 더불어 없어지고 마는 권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힘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면, 의무 때문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 또 복종을 강요받지 않을 경우에는 복종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가장 강한 자의 '권리'라는 말은 다만 '힘'을 나타내는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전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권리에 복종하라는 이 말이 만약 힘에 굴복하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좋은
교훈이지만 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교훈이 깨뜨려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보증한다. 모든 권력이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질병 또한 신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의사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숲속 한 모퉁이에서 강도가 내게 덤벼들었을 때, 내가 강제로 지갑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경우뿐만 아니라 내가 지갑을 내놓지 않아도 될 경우에도, 내게는
양심적으로 그것을 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강도가 갖고 있는 권총도 역시
하나의 권력이니까.
여기서 힘은 결코 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정당한 권력 이외의 것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나서 내가 처음 제기한 문제(15)를 다시 생각해 보자.

노예 상태에 대하여

그 누구도 나면서부터 자기의 동료를 지배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 힘으로부터는
어떠한 권리도 생기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인정되는 모든 정당한 권위의
기초는 오직 약속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로티우스는, 만일 어떤 개인이 자기의 자유를 양도하여 스스로 어떤 주인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인민 전체가 그들의 자유를 양도하여 어떤 왕의 신민이 될 수 없겠는가
하고 말한다.(16) 이 문장에는 설명을 요하는 모호한 말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양도한다'는
말에 국한시켜 검토해 보자. '양도한다'는 말은 '준다'는 뜻이거나 '판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인간은, 자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생활 수단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팔겠는가? 왕은 신민들에게 생활
수단을 마련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자기의 생활 수단을 오직 신민들로부터 빼앗아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라블레에 따르면, 왕은 적은 물자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민들은
왕이 그들의 재산마저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왕에게 그들의 몸을 바치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신민들이 보존할 만한 것으로 그들에게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전제군주는 그 신민에게 사회적 안녕을 보장해 준다고 하는 자도 있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만일 전제군주의 야심이 신민들 자신의 분쟁상태보다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면, 신민들은
그런 사회적 안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와 같은 안녕 자체가 신민들이 겪는
불행 가운데 하나가 된다면, 그들은 그러한 안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키클로페스의
동굴에 유폐된 그리스인들(17)은 거기서 대단히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잡아먹힐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몸을 아무 대가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행위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정신이 나갔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정당하지 못하고 무익한 행위인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것을 인민 전체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것은 인민을 미치광이로 취급하는 것이다. 광기로부터는 어떠한 권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설령,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양도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자기의 자식들까지 양도할
수는 없다. 자식들도 인간으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자유는 오직 그들
자신만의 것이므로 그들만이 자기의 자유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이 철이 들 때까지 아버지가 그들의 생존과 행복을 위하여 그들 대신 여러 가지 조건을
체결할 수는 있지만, 취소할 여지도 없이 무조건 그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증여는 자연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부권을 넘어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전제정부가 정당한 것이기 위해서는, 각 세대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그것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정부는 이미 전제적인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부터 자유를 완전히 빼앗는다는
것은 그의 행위로부터 도덕성을 완전히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한 편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다른 편에게는 무제한의 복종만을 요구하도록 규정된 약속은 무의미하고 모순에
찬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동등한 대우도 없고 상호
교환도 없다는 조건 하나만 하더라도, 그 속에는 약속의 무효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내 노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고 그의 권리가 모두 내 권리로 되어, 특별히 내
권리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될 때, 내게 대하여 그가 가질 수 있는 권리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티우스와 그 밖의 사람들은 이른바 노예권이 생긴 또 하나의 기원을 전쟁에서 찾고
잇다.(18)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승자에게는 패자를 죽일 권리가 있으므로 패자는 자기의 자유를
대가로 하여 생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승자와 패자 쌍방에게 이익이 되므로
더욱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패자를 죽일 이 권리가 전쟁상태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인간이
원시적인 독립상태를 이룰 만큼 지속적인 상호관계가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적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가 아니다. 그리고 전쟁상태는 단순한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사적인 전쟁, 즉 개인과 개인간의 전쟁은
고정된 소유권이 없는 자연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없고 모든 것이 법률의 권위 아래 놓여 있는
사회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
개인간의 투쟁, 결과, 충돌 등은 지속적인 상태를 이룰 만큼의 계속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칙령(19)에 따라 공인되었고 '신의 평화' 선언(20)에 따라 정지된
개인적인
투쟁에 대하여 말한다면, 실상 그것은 봉건제도의 악습이었던 것이다. 봉건제도는 자연법의
제원칙과 모든 훌륭한 '정치제도'에 위반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전쟁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서, 이때의 개인은 인간으로서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3 오직
병사로서만 우연히 서로 적이 되고 있다. 조국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조국의 방위자로서
개인은 서로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각 국가는 다른 국가를 적으로 가질 수 있을 뿐이지
인간들을 적으로 가질 수는 없다. 성질이 다른 사물 사이에는 어떠한 진정한 관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모든 시대를 통해 확립된 여러 가지 관례와도 합치되고, 또 모든 문명 국민들의
관행과도 합치된다. 선전포고는 권력자에 대한 포고라기보다는 그들의 신민에 대한 포고이다.
군주에 대하여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그 신민들을 강탈하고 살육하고 억류하는 외국인은,
국민이건 개인이건 또는 인민이건 간에 그것은 적이 아니라 강도인 것이다. 한창 전쟁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공정한 군주는 적국의 국가 재산은 모두 몰수해 버리지만 개인의 생명과
재산은 존중한다. 그는 자기네 권리의 기초가 되고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전쟁의 목적은
파괴에 있기 때문에,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그들을 죽일 권리가 있으나, 그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즉시 그들은 적이나 적의 도구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므로,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게다가 때로는 국가의 구성원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그 국가를 멸망시키는 수도 있다. 따라서 전쟁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그로티우스가 세운 원칙도
아니고, 시인(22)의 권위에 근거를 둔 원칙도 아니다. 이 원칙은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이성에 근거를 두로 있는 원칙이다.
정복의 권리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가장 강한 자의 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
불과하다. 만약 전쟁이 강자에게 패전국민들을 살육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승자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이 권리가 패전국민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 권리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누구든지, 적을 노예로 만들 수 없는 경우--무기를 버리지 않는 경우--에만 적을 죽일 수 있는
권리로부터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적에게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교환이다. 적의 생명에 대해서는 승자도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예권을 근거로 하여 생살의 권리를 세우고 나서 그 생살의 권리를 근거로 하여 노예권을
세운다는 것은, 분명히 순환론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 무서운 권리를 인정하더라도, 전쟁에서 생긴 노예나
정복당한 인민은 그들이 복종하도록 강요당하는 동안만 주인에게 복종할 뿐이지 주인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대신
생명의 대가로 자유를 빼앗는 것은 패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패자를 무익하게
죽이는 대신 유익하게 죽이는 것뿐이다. 결국 승자는 패자에 대하여 힘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전쟁상태는 그들 사이에 계속되며, 양자의 관계 그 자체도 전쟁상태의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한, 어떠한 평화 조약도 성립되지 않는다. 승자와
패자가 하나의 약속을 체결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 약속은 전쟁상태를 타파하기는커녕 그 계속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각도에서 보더라도, 노예권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불합리하고 무의미하다는 이유에서도 무효인 것이다. '노예'라는 말과 '권리'라는 말은 서로
모순될 뿐이며 양립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나는 너하고 한 가지 약속을 하는데, 이 약속의
부담은 모두 네가 지고 이익은 모두 내가 차지한다. 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동안만 이 약속을
지키지만, 너는 내가 좋아하는 동안 계속 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개인에게 한 말이든 전인민에게 한 말이든 간에 항상 잘못된 말이다.

항상 최초의 약속으로 소급해 보아야 한다.

설령, 내가 지금까지 반박해온 점들을 모두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전제정치를 지지하는
자들(23)의 입장은 조금도 유리해지지 않을 것이다. 군중을 복종시키는 것과 사회를 통치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커다란 차이가 있다. 흩어져 있던 많은 개인들이 한 사람씩 어떤 인간에게 예속될
때,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이지 지도자와 인민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막연히 모인 집합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결합체라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공공복지도 없고 정치체도 없다. 비록 그 사람이 세계 인구의 절반을 예속시킨다 해도,
그는 역시 하나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의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사적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는 날이면 그의 제국은, 마치 참나무가 불에 타면서
해체되어 잿더미로 변해 버리듯이, 뿔뿔이 흩어져 통일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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