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호피뉴스와 튼살치료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이 2010년 5월 26일 표범 양탄자를 공개했다.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명성황후(1851~1895) 표범 양탄자와 유사한 유물이다.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는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다. 명성황후의 접견실에 깔려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6·25 동란 당시인 1951년 5월 미국인 길트너 중사가 25달러에 사들여 미국으로 유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당국과 뉴욕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노력으로 같은 해 국내 반환됐으리라는 추측이다.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찾기와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이 소재 파악에 나서면서 존재가 드러났다.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2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와 유사한 유물이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지 공식적으로 확인 요청을 받았다”며 “‘라이프’지에 등재된 사진과 유사한 표범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소장돼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표피(豹皮)는 세로 6줄의 무늬와 주위 테두리에 파상형 붉은 천 장식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처럼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다. 크기(243×574㎝)도 1951년 사건 당시 미국 월간 ‘라이프’에 공개된 크기(250×560㎝)와 엇비슷하다. 문제의 문화재와 동일품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러나 확연한 동일품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도 있다. 김울림 학예연구사는 “건청궁 내에서 명성황후의 실제 사용 여부와 소장경위에 대해서는 아직 확증적 자료가 없다”며 “뒷면의 오얏꽃 문양 장식으로 미뤄 대한제국 황실 소용으로 제작됐던 것은 확실하다”고 전했다. 명성황후가 변을 당해 사망한 것은 1895년, 대한제국이 출발한 때는 1897년이다. “오얏꽃 문양이 대한제국 이전에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양탄자에 사용된 실과 제작기법을 분석, 정확한 제작 연도를 따져볼 계획”이다. “크기나 보존 상태 측면에서도 비교할만한 유물이 없는 만큼 그 가치는 매우 클 것”으로 짚었다. 이 유물은 2009년 ‘잔치풍경-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전시에 출품될 예정이었으나 워낙 커서 진열장 내 전시가 불가, 무산된 바 있다. 조 학예실장은 “호피(虎皮)라고 유물 이름만 기재됐을 뿐이지 정확한 용처에 대한 기록은 없다”며 “최근 명성황후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이 유물이 명성황후가 사용했던 양탄자가 아닌지 추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전시 때는 단지 향연과 의례용으로 바닥에 깐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위 기사를 보면 일본의 낭인에게 죽은 비운의 왕후 명성황후의 슬픈 역사가 생각난다. 필자는 나라를 망하게 한 고종,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명성황후는 고종을 잘못 인도한 책임이 있지만 그 최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통할 뿐이다. 일제는 특히 명성황후 죽이는 것을 여우사냥이라고 했으며 명성황후란 정식 명칭 대신 민씨 비인 민비라고 부르게 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일제의 음모인지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다른 궁녀 사진이 명성황후 사진인 것처럼 가짜로 떠돈 적이 많다. 필자는 호피나 표범가죽을 직접본 적은 없지만 그 특이한 무늬는 아름답게 생각한다. 오죽하면 여성의 속옷에도 호피무늬가 들어있기도 하겠는가? 호랑이 무늬는 숲속에 숨어 있게 좋게 하기 위해서 검은 색과 약간 황토색이 번갈아 있다. 우리 몸에도 호피와 같은 안좋은 무늬가 있다. 이것을 팽창선조라고 의학적으로 이름하며 바로 튼살이다. 호랑이는 가죽무늬처럼 숨지만 이 튼살은 반대로 흰색이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더 뜨이게 된다. 특히 튼살이 많이 눈에 뜨이기 때문에 사우나나 찜질방, 수영장에 못가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많다.
하지만 한방 피부과 전문의가 진료하는 이미지 한의원에서는 침만으로 튼살이 치료가 가능하며, 진피의 콜라겐을 차오르게 하며 흰색을 정상 피부톤으로 바꿔주는 시술을 하고 많은 성과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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