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8일 수요일

방효유의 10족 멸망과 저출산 튼살치료

방효유의 10족 멸망과 저출산 튼살치료


방효유(方孝孺, 원 지정(至正) 17(1357) ~ 명 건문(建文) 4(1402))는 명나라 초기의 학자다.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이며, 호는 손지(遜志). 1392(홍무 25) 4월에 평소에 병약하던 황태자 주표가 사망하자, 불과 15세이던 후궁 여씨 소생의 서장자인 황장손 주윤문이 황태손으로 책봉되었다. 황태손 주윤문을 지도할 스승으로는 젊은 유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하던 방효유를 비롯해 유삼오와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가 낙점되었다.
1398(홍무 31)에 홍무제가 승하하자, 황태손 주윤문이 건문제(建文帝)로서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건문제의 즉위에 따라 평소 그에게 신임받던 방효유도 중용되어 시강학사(侍講學士)에 올랐다. 건문제의 고문이 된 방효유는 덕치에 의한 정치체제를 목표로 삼고 국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방효유는 왕도를 밝히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방효유는 홍무제의 엄격한 정치를 유화 정치로 전환하였으며, 이에 따라 유생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황제 독재체제를 부분적으로 완화하기도 했다. 한편, 독서를 좋아한 건문제는 책을 읽으며 의문이 생길 때마다 방효유를 불러 풀이를 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아가 나라의 큰일에 관해서도 모조리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또한, 조정의 모든 대사들은 방효유를 직접 만나서 가부를 결정받도록 하였다.
당시 방효유와 건문제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새 황제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권력 기반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이를 염려한 방효유는 이 무렵 건문제에게 조언하는 의미에서 심려론(深慮論)을 지어 바쳤는데, 이 글에서 "화는 언제나 소홀하게 다룬 데서부터 일어나며, 난은 언제나 별로 의심할 것도 없는 일에서부터 일어난다."라고 주장하였다.
홍무제는 평소에 어린 황태손이 노련한 공신들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하여, 생전에 수많은 공신들을 학살하였다. 하지만 주변에 훌륭한 대신이 거의 남지 않게 되어, 건문제의 지지기반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크게 상실되었다. 반면, 연왕 주체를 비롯하여, 각 변방에 포진해 있던 황제의 숙부들은 야심을 키우고 있었고,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경의 조정에서는 고심 끝에 꾀를 내어, 이들을 한 명씩 황궁으로 불러들인 후 제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성격이 유약했던 건문제는 숙부들을 핍박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효유를 비롯한 여러 근황파 대신들이 간곡히 주청한 결과, 지방 번왕들의 영지로 첩자와 자객들이 파견되었으며, 그들의 언동을 비밀리에 감시하였다.
황제와 숙부들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각지의 번왕들이 작위를 박탈당하는 일도 일어나자 마침내 북평을 다스리고 있었고 당시 홍무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연왕 주체가 "황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목 하에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황제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으나, 홍무제의 숙청으로 많은 장수들이 제거되어 훌륭한 장수는 드물었다. 반면, 주체의 군대는 북방에서 오래 북원의 몽골족과 전투를 치러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되어 사기가 드높았다. 한편, 주체의 책사 도연(道衍)은 주체에게 "성이 함락되어도 방효유는 절대로 투항하지 않을 것이니 죽이지 마십시오.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책 읽는 자가 끊어집니다!"라고 간청하였다.
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의 결과, 결국 주체의 정예병이 황제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색이 짙어져 가자 장군이 부족한 탓에 전쟁과는 무관한 방효유마저 관군의 총사령관으로 차출되었으나,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어려웠다. 1402(건문 4), 마침내 수도 남경이 함락당하자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질렀는데 부인 효민양황후는 불에 타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었지만 건문제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남경을 함락시킨 주체는 사흘 동안 궁궐 안을 샅샅이 뒤지며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신하들을 거의 다 처형했다. 그러나 건문제의 스승이자 연왕 제거론의 주역이었던 방효유만큼은 그 학문적 명성과 권위를 의식하여 살려두었고, 궁문 앞에 엎드려 건문제를 애도했다는 이유로 옥에 가둔 후에도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주체는 당대의 대학자인 그를 회유하여 정난의 변으로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 일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유생들의 지지까지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방효유는 이미 경청(景淸)과 함께 건문제에게 남은 충성을 바치자고 결의하였다. 경청은 혼자 칼을 숨기고 입궁하였는데 주체가 이를 의심해 몸을 수색하여 칼을 찾아냈다. 연왕이 이를 문책하자, 경청은 옛 주인을 위해 복수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격분한 연왕은 즉시 경청과 그 일족을 처형했으나, 방효유만큼은 정성껏 대접하였다.
주체는 방효유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는데, 방효유는 건문제에게 예를 다하려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있었다. 주체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언변과 태도로 방효유에게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동기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주체를 불신하고 건문제에게 충성을 지키려는 방효유의 자세는 한결같았다. 이때 주체와 방효유가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주체 : 그대는 주 성왕(周成王)을 보좌한 주공(周公)을 따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방효유 : 지금 성왕은 어디에 있는가?
주체 : 그는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방효유 : 왜 성왕의 아들을 황제로 앉히지 않는가?
주체 : 나라가 연장자를 군주로 모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방효유 : 왜 성왕의 동생을 황제로 앉히지 않는가?
주체 : 이는 내 집안일이니 선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침내 주체가 자신의 즉위 조서 초안을 작성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지필묵을 주자, 방효유는 "연적찬위(燕賊纂位)"라는 글만을 적어냈다. 이에 격노한 주체가 방효유에게 구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하였으나, 방효유는 "구족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잡을 수는 없다"고 맞받아쳤다.
이 말을 듣고 극도로 분노한 주체는 방효유의 입을 양쪽 귀밑까지 찢어놓고 두 귀를 잘라냈으나, 방효유는 부릅뜬 눈으로 주체를 쏘아보며 고통을 참아내기만 했다. 이어 주체는 방효유의 일가친척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방효유의 혈족은 모두 형장으로 끌려나와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씩 참살되었다. 이를 뜬눈으로 지켜보며 매번 조서를 쓸 것인지 협박을 받으면서도 방효유는 지조를 거두지 않았고, 숙청은 밤새 계속되었다.
마침내 주체는 방효유의 구족을 모두 참살하였으나, 그것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제자, 선후배, 친구, 문하생 등 방효유와 평소에 친분관계가 있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잡아들인 후, 이를 '열 번째 일족'으로 규정하고 목을 벴다. 이로 인해 방효유와 연좌되어 참수된 사람은 모두 873명에 이르렀으며, 유배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 주련십족(誅連十族)이라고 한다. 방효유는 이 모든 일들을 강제로 하나하나 모두 지켜본 뒤에야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다. 참수당하기 직전, 취보문(聚寶門) 밖으로 끌려가던 그는 다음의 절명시를 남긴다.
 
하늘이 난리를 내리시어 흩게 되니 어찌 그 연유를 알소냐
삼강은 그 있던 곳이 바뀌고 사유(예의염치)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골육끼리 서로 죽이며 친척을 일러 원수라고 하고
간신이 흉계를 얻어 나라를 농락하는구나
충신 분()을 발()하여 피눈물 함께 흐른다
이제 임금을 따라 죽고자 하니 또 무엇을 바라랴
오호 통재라, 무릇 나의 잘못은 아니거늘.
 
조선시대에는 3족정도는 없앤 경우는 있지만 아마 방효유처럼 완전 일족이 전멸한 잔인한 역사는 드물다.
조선시대의 모반대역죄의 연좌 범위를 적용했던 법전인 대명률이나 경국대전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3족의 범위를 조족(祖族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부족(父族 형제와 그 소생인 조카), 기족(己族 아들과 손자)이라 하였으며 여기서 연좌를 면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 출가한 딸, 양자로 간 아들과 손자 등이다.
9족은 (1)9대에 걸친 친족계열로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본인,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
(2)부계4친족(父系四親族 고모의 자녀, 자매의 자녀, 딸의 자녀, 자기의 동족)과 모계3친족(母系三親族
외조부모, 이모의 자녀)그리고 처족2친족(妻族二親族 장인 장모)까지
(3)고조의 4대손이 되는 형제,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를 포함한 동종친족까지 등 여러 분류가 있으며,
3족을 멸한다는 의미의 이 조선의 연좌제는 고종31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중국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멜서스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식량은 부족했으므로 인구 폭탄에 대한 인명경시사상일수 있다. 중국에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마구 짓는 이유도 그런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도 최근 산아제한에서 호적에 못올리는 흑해아 문제가 심각해서인지 출산인구 제한을 풀어주고 있다. 아마 출산율 저하를 성공리에 시키고 이제 저출산을 고민하는 한국을 벤치마킹하는 것 같은데 필자는 중국 인구도 줄것이라고 예상한다.
각종 한국 예언서를 보면 백조일손(百祖一孫) 혹은 천조일손(千祖一孫)이라 하여 백명 혹은 천명의 할아버지들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의 손자만 목숨을 이어간다는 비결이 존재한다. 물론 급격한 전쟁, 기근, 전염병등일수도 있지만 경제난에 대한 정부 대책잘못으로 천천히 사람숫자가 줄어드는 soft kill소프트 킬일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예전 필자가 어렸을때 버스를 타거나 거리를 가면 엄마가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아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많은 경우가 많았다. 항상 아이들로 시끄러웠고 아이가 정말 넘쳐났으며 물론 신설학교였지만 워낙 학생수가 많아서 심지어 2부제 수업이라고 해서 4학년때 초등학생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와 임산부들이 정말 명태가 한반도에서 사라지듯이 속칭 씨가 말랐다. 따라서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의 튼살치료에도 변화가 보이는데 기혼의 임신 산후 튼살 치료보다는 미혼의 종아리나 허벅지 튼살 치료 환자가 훨씬 더 많다. 생기는 비율로 보면 임신으로 튼살이 생기는 비율이 더 크지만 말이다.
이미지 피부과 한의원에서는 튼살을 ST침으로 치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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