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금요일

고골 원고 불태우기와 화상흉터치료

고골 원고 불태우기와 화상흉터치료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 미콜라 바실리오비치 호홀, 1809320~ 1852221)은 우크라이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 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암시를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것은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으나,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출판사는 고골에게 새로운 빌라를 마련해 주었고 그는 다시 아무 걱정 없이 음식에 탐닉할 수 있었다. 고골은 아무런 착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회의에 괴로워하다가 고골은 비극을 썼다. 그가 이 작품을 낭독하는 것을 듣던 한 친구는 지루함에 못 이겨 잠이 들고 말았다. 고골은 원고를 난로 속에 집어 넣었다.
궁지에 몰린 고골은 마테우스 콘스탄티노스키 수도사에게 종교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성직자는 종교적인 믿음을 주는 대신에 무당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푸시킨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너 자신에게 말하라. 그는 죄인이자 이교도였다.”사제는 죽은 자의 정신을 악마로 취급하여 몰아냈으며 고골에게 장기간 금식을 하도록 했다. 유령들은 그가 죽은 혼2부를 완성해 놓았지만 사실을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공황상태에 빠진 그는 10년에 걸쳐 작업한 원고를 난로에 던져 불태워버렸다.
광기에 관한 잡학사전, 미하엘 코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을유문화사, 페이지 34-35
 
고골을 보면 다작을 했지만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 자기 원고를 불태우기를 반복했다. 사실 원고는 종이로 되어 있으니 불에 태우고 잊으면 그뿐이지만 사람이 불에 화상을 입으면 영원히 낙인처럼 남는다. 또한 한순간에 화마로 고골의 명작들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듯이 인간도 불에 데이면 순식간에 큰 피해를 겪는다. www.jahyangmi.co.kr 강남역 8번출구에 있는 자향미 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를 화상후 흉터침인 BT침으로 화상흉터를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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