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를 피해 이주한 고공단보와 화상흉터 이식수술대신 BT침
위영공은 공자에게 군사 방면의 일을 물었지만 그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가 군사를 잘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군국 사상적인 아심을 더 가중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양 혜왕도 조나라를 침략하러 출병하기 전에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끝내 정면의 문제를 회피한 책 그저 그에게 주대의 선조인 태왕(고공단보)의 고사만 들려주었습니다.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豳)땅에서 살았는데, 정치가 맑아서 백성들 이 대단히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융적(戎狄)의 침범을 받자 백성들은 분개하여 일어나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공단보 는 도리어 전쟁의 살육을 차마 보지 못해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낙토인 빈 땅을 떠나 기산(岐山)아래로 옮겨 갔습니다. 대다수의 빈 땅 사람들이 그의 덕정을 좋아하여 그를 따라 옮겨 갔습니다. 그 후 계력(季歷)과 문왕(文王)이 이를 계승하여 더욱 빛내자 각지의 백성들이 스스로 나아와 귀화하였으니, 마침내 천하의 삼분의 이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무왕 때에 이르자 쉽사리 잔인하고 포악한 주왕의 자리를 빼앗아 들어서게 되었고 국호를 주(周)라 고쳤습니다.
사마천은 이어서 말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세속에 아첨하며 구차하게 영합하는”, 즉 시대 기풍에 타협하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사리 영합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려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차라리 진리와 정의를 위해 가난과 고통을 받을지언정 구차하게 현실에 타협하여 부귀와 공명을 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한 천리 와 인륜 그리고 정치도덕의 이상은 현실 사회에 대해서, 비유하자면 마치 네모난 마개를 둥근 구멍에 집어넣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차간에 맞지 않았습니다.
맹자와 양혜왕 孟子旁通 맹자와 양혜왕, 남회근저, 부키 출판사, 설순남 옮김, 40-41 페이지
주 태왕(周 太王, ? ~ ?)은 중국 상나라의 제후국인 주(周)의 제후이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단보(亶父)이다. 공숙조류의 아들이고 계력의 아버지이며, 훗날 서주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숭했다. 추숭되기 이전에는 고공(古公)으로 칭해졌고, 《사기》에서는 그 고공과 이름인 단보를 합쳐서 고공단보(古公亶父)로 칭해졌다.
공숙조류가 죽고 뒤를 이었는데,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태왕을 받들었다.
융적(戎狄)들 중 하나인 훈육(薰育)이 공격해와서 재물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다시 공격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대답했다.
“ 백성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자신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오. 지금 융적이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그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 ”
그리고는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漆水), 저수(沮水)를 건너고 양산(梁山)을 넘어서 기산(岐山) 아래 정착했다. 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이들을 이끌며 모두 기산 아래에서 태왕에게 다시 귀순했다. 그 이웃나라의 사람들도 태왕이 인자하다는 소문을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했다. 이때 태왕은 융적의 풍속을 개량하고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으며, 오관유사(五官有司)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노래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태왕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중옹(仲雍)이 있었다. 그의 아내 태강(太姜)이 낳은 막내아들 계력(季歷)은 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태강과 태임은 모두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길조가 있었다. 그러자 태왕은 "나의 시대에 큰 사업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창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태백과 중옹은 아버지가 계력을 세워 창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것을 알고는 둘이서 형만(荊蠻)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자리를 계력에게 양보했다. 마침내 태왕이 죽자 아들인 계력이 자리를 이었다.
고공단보는 오랑캐에게 져주는 척 해서 땅을 옮겨가서도 오히려 중국 주나라 천자의 시조가 되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것인데 사실 사람이 지역을 옮겨서 잘 된 경우도 있지만 잘못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번창했던 가게인데 더 이동이 편하고 좋은 곳으로 확장 이전을 했는데도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피부 화상흉터 치료도 마찬가지인데 공여해준 부위를 기증할 부위로 이동하면 오히려 더 흉터가 도드라져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팔에 화상을 입었다면 잘 안보인다고 생각하는 엉덩이나 허벅지에서 피부 이식수술을 한다. 위 문제는 팔과 엉덩이 허벅지의 피부 두께가 다르다는 점이다. 또 공여를 해준 부위에 흉터가 남으니 흉터가 2배이상이 되게 되며, 또 옮겨 심는 과정에서 피부 생착이 잘 안되거 꺼멓게 피부가 죽거나 아니면 옮겨심은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해지는 단점이 있다.
02-8432-0075 www.jahyangmi.co.kr 강남역 8번출구에 있는 자향미 한의원에서는 한방 피부과 전문의 홍성민 원장이 2017년 4월 4일부터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화상흉터를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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