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신촌이미지한의원 추천책 무지개가게

씩씩한 김치 아줌마: 언젠가 돌아올 아이를 위해 오늘도 씩씩하게 김치를 배달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 공단에서 야학 활동을 했습니다. 민주화 물결이 일고, 열악한 공장에선 뒤늦게 노조가 만들어지던 때입니다. 저 역시 그 물살을 타고 학생 운동에 참여해 미술 단체 활동을 하다가 애들 아빠를 만났습니다. 그를 집안에 소개하고 나서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겨를도 없이 주변 상황에 밀려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혼 여행지에서부터 고민에 빠지게 되더군요. 남편과의 문화 차이, 생활 차이는 자꾸 결혼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애들 아빠는 잔정이 없는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선지 남에게 사랑을 온전하게 줄지도 받을지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때문에 저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유별났습니다. 사랑을 소유 개념으로 인식해 제가 사회생활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까지 일일이 간섭을 했습니다.
아이를 셋 낳아 기를 때까지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평소 소심한 남편은 술이 들어가면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 절 힘들게 했습니다. 원망을 끝없이 쏟아 내는 남편을 보며 저도 서서히 마음의 벽을 쌓아 갔습니다. 남편은 서초동에서 큰 규모로 소 곱창 구이를 하다 IMF를 맞아 가게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이후 중소기업 아이디어 물품과 아이들 장난감 판매를 했는데, 투자하고 망하길 반복했습니다.
이혼, 그리고 교통사고
한지 공예를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사범증까지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한지 공예 초창기였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만큼 그 성과도 바로 바로 나타났습니다. 전시 참여가 잦아질 때 남편은 가게를 정리했고, 저는 친정 근처 신림동으로 이사해 공방을 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편과 암묵적인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보라매 청소년 회관, 관악 여성의 집, 서초 일하는 여성의 집, 학교 등으로 출강을 했습니다.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해서 상을 받자 공방에 젊은 수강생들이 많아졌습니다. 별거 상태였지만 남편은 자주 찾아와 마음을 돌려 예전처럼 살자고 회유를 했습니다. 휘둘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욱 작품과 전시에만 매달려 지냈습니다. 파리 전시를 앞두고 남편과 날카로운 대립을 벌였습니다. 저는 이혼을 원했고 남편은 그럴 수 없다 했지요. 그로 인해 저는 심한 우울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남편을 피해 경북 청송 오지 동네로 도망가듯 이사를 했습니다. 부엌에 장작을 땔 수 있는 황토집에서 아이들과 1년 간 꿈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친정 식구들이 애들 아빠를 설득해 원하던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아 괴산 연풍으로 갔습니다. 마침 연풍에서 한지 공장 하시는 분이 공예 파트너를 찾고 있다더군요. 그곳으로 이사해 한지 공예 체험 학습장인 아현 한지 공예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큰 전시 때문에 며칠 밤을 세우다시피 해서인지 연풍으로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3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고, 이후 손목에 박은 쇠 제거 수술까지 1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 사이 남편은 사업 실패 후 수중에 남은 돈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두 번째 수술을 받던 날,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고 넉넉하지 않은 통장 잔고는 금방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다행히 한지 공예 기술이 있어 인근 학교에서 강의를 했지만, 넉넉한 수입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지 공예 체험 학습장을 운영했지만 워낙 불황이라 결국 철수하게 되었고 수중엔 돈 4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무작정 시작한 김치 장사
하루는 1박 2일 체험 프로그램으로 충주에 갔다가 김치를 배달시켜 먹을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아주 좋더군요. 그날 운영하는 사람이 직접 김치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장기적으로 자기네 김치를 살 사람과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김치 사업이 괜찮을 듯 보이더군요.
큰 자본금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그분의 말에 저는 합류를 결정했습니다. 점포를 얻고, 친구에게 돈을 더 빌려 대형 냉장고를 설치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일 진행이 빨랐습니다. 그분이 수입 김치를 유통하는 분이라 저도 수입 김치 유통에 뛰어들었지요.
길눈이 어두워 같은 곳도 낮 다르고 밤 달라 보이는 저였지만, 충주 지도에 일일이 체크를 해가며 홍보할 식당 이름을 꼼꼼하게 적어 두었습니다.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은 얼굴에 철판을 까는 일이었습니다. 기존 거래처가 있는 곳을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신뢰 관계를 맺어 온 곳을 버리고 제 김치를 선뜻 들여놓은 집은 없었습니다. 갈수록 영업은 힘들고 그만큼 성과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빚은 늘어나고 몸은 지쳐 갔습니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가기 위해 이번엔 국산 김치로 제 브랜드를 만들어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김치 유통을 하는 분들을 찾아가 자문도 구하고, 김치 시장의 현황도 들어 보고, 김치 관련 커뮤니티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뒤져 김치 업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걸 먹으라고 만들었어? 당신이 한번 먹어봐!
저는 공장에서 김치를 만들 때 사과 엑기스를 첨부해 정식으로 브랜드화 시켰습니다. 제가 하는 사업은 김치 공장에서 만든 김치를 여러 곳에 납품하는 일종의 󰡐OEM󰡑방식의 사업입니다. 충주 지역은 직접 배달하고, 온라인 주문은 직접 체크해 택배로 배송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이걸 먹으라고 만들었어? 당신이 한번 먹어 봐.󰡓
처음엔 김치 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양념을 써도 파와 마늘, 양파 등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지 못해 좋은 맛을 낼 수 없더군요. 대량으로 생산했다가 모두 폐기 처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품질 자체에 잘못이 있으면 공장이 책임을 지고, 유통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제가 책임을 지는 식으로 점차 능률적으로 자기 역할을 구분지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씩씩한 김치 아줌마
지금은 󰡐찬누리김치󰡑를 가정집에 보급하기 위해 옥션 등 온라인 시장을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충주에 매장을 두고 아파트를 중심으로 오피스텔, 빌라 등 가정집 배달까지 합니다. 공들인 보람이 있는지 김치 맛이 감칠맛 나고 개운하다며 점차 주문하는 세대가 늘어 저 역시 힘이 납니다.
가끔은 공장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공장에선 대기업 물량을 빼 주느라 제 차례가 안 돌아오기 때문이죠. 주문을 잔뜩 받아도 물량이 제때 따라 주지 않으면 신용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그런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매장의 대형 냉장고에 김치를 채워 넣기 전까진 주문을 받지 않습니다. 물량을 확보해야 주문을 받고 포장에 들어가 아이스박스에 아이스 팩을 넣어 배송합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홍보비가 많이 들더군요. 1년은 광고를 해야 한다고 각오하고 아직까지 저희 상품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요즈음 어느 분의 후원으로 충주 조손가정 다섯 집에 매달 한 번씩 김치와 고등어를 배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혹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불편해하실까 봐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해도 되도록 거절합니다. 안부 정도만 여쭈어 보는 편입니다. 처음에는 냉장고에 배달 식품을 넣어 드리고 갔는데 썰렁한 냉장고 안을 낯선 사람이 들여다보는 걸 민망해하시는 것 같아 특별히 몸이 불편하신 분 말고는 집 안쪽에 밀어 넣어 두고 옵니다.
사실 이런 분들을 후원해 주는 분이 있어 저도 매월 고정 매출액이 생기니 그분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박한 세상에 그대로 누군가 없는 사람을 위해 애쓰는 이가 있다는 것은 용기를 주는 일입니다.
미국으로 떠날 때 11살이었던 딸아이는 벌써 16살이 되어, 메일도 보내고 블로그에 최근에 찍은 사진도 올려 놓습니다. 요즘은 전화 통화도 틈틈이 하고 있고요. 언젠가 돌아올 그 아이들을 위해 저는 오늘도 씩씩하게 김치 배달에 나섭니다. 저희 김치를 먹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깃들길 바라면서 말이죠. 그리고 먼 곳에 있는 내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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