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이상의 오감도와 조감도 이미지한의원의 튼살 치료

이상의 오감도와 조감도 이미지한의원의 튼살 치료







<오감도 - 이상>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10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를 봤지만 이 간첩 접선 암호문과 같은 내용을 도저히 이해가 어렵다. 해설을 찾아보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난해시(難解詩)로서 일대 물의를 빚어 독자들의 비난 투서가 빗발치듯 하므로 이태준은 사표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연재를 중단하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파격적인 시로서, 그때까지의 시의 고정관념을 크게 타파한 작품이었다.《오감도》 제1호에 등장하는 ‘13인의 아해’는 최후의 만찬에 나온 예수의 13제자를 상징한다는 해석과 무수(無數)를 나타내거나 조선의 도(道)인 수 ‘13’으로 하였다는 설명 등 구구한 해설이 있으나, 평자에 따라서 무한한 견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구체적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반면, 전체적인 인상에서 얻어지는 불안감·공포감·혼란감 등이 독자에게 막연히 전달될 따름이다.





이 오감도는 원래 조감도(鳥瞰圖, bird's-eye view)를 잘못 쓴 것이 아니나고 항의를 받았다. 그런데 까마귀란 왠지 불길하고 우는 소리가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일부러 쓴 것 같다. 오감도란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본 것처럼 지표를 공중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았을 때의 모양을 그린 그림이다. 사실 산정상에서 멀리서 보면 도시도 평온하고 작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물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물을 거리를 떨어져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종아리나 허벅지등의 튼살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면 징그러운 벌레처럼 보이고 살이 쪄 보이는 등 약간 미적으로 안 좋아보이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튼살이 있는 사람은 까마귀가 자신을 노려보는 오감도의 시처럼 다른사람이 쳐다볼까봐 공포나 불안을 느끼고 사는 것이다. 그런 불안과 공포는 정신적인 극복으로 가능도 하지만 실제 이미지한의원에서 특수침만으로 튼살 치료를 받아서 치료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불안이란 막연한 두려움이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공포란 대인공포처럼 특정 대상에 의해서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에 많은 불안 공포등은 실제존재하지 않으며 본인이 치료를 받고 튼살이 없는 모습을 상상하며 인지해서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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